‘나도 모르게’의 한 장면.
할리우드 영화사에는 명배우 출신 명감독들의 목록이 있다. 워런 비티, 로버트 레드포드, 케빈 코스트너, 우디 앨런,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은 자신들이 감독한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조디 포스터나 조지 클루니, 포레스트 휘태커는 물론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도 감독을 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사에 명배우 출신 명감독의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고한 김진규 최무룡 박노식 등 1960, 70년대에 활약한 스타 배우들이 감독을 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 흥행에서 참패했거나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에는 ‘오로라 공주’의 방은진 등이 감독에 도전한 바 있다.
“많이들 오셨다. 단편영화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 단편영화가 너무 호화롭게 개봉하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청바지에 청재킷을 걸친 유지태는 자신의 세 번째 단편영화 시사회가 열린 스폰지하우스에 몰려든 많은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인사했다. 단편영화 시사회에 TV 카메라가 등장한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인사를 위해 무대에 오르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주연을 맡은 조안은 깜짝 놀라며 눈이 부신지 손으로 플래시 빛을 가렸다.
남자 주인공 이대연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선배님을 생각하며 대본을 썼다는 유지태의 말을 듣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대연은 “그동안 유지태가 만든 단편영화를 보면서 배우 후배로서의 유지태가 아니라 감독 유지태를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시면 이제 감독으로서 유지태의 행보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2월 말, 7년 만에 중앙대 대학원을 졸업하며 석사모를 쓴 유지태는 최근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주영훈이 프로듀싱한 대형 신인가수 나오미의 팝 발라드 ‘몹쓸 사랑’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것이다. 단편영화 감독으로, 연극 제작자로,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는 유지태가 가장 공들이는 것은 역시 영화감독으로서의 유지태다.
‘나도 모르게’는 옛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차에 앉아 운전하는 남자의 시점 샷으로 시작한다. 초점이 흐려졌다 또렷해지고 다시 흐려지기를 반복하면서 차는 도심을 지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다. 밖으로 나오면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데, 차 안에는 중년의 남자(이대연 분)가 운전을 하고 있고 그 옆에는 젊은 여자(조안 분)가 앉아 있다. 여자는 계속해서 남자에게 차를 돌리라고 혹은 멈추라고 소리치지만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 얽힌 게 있다면 풀고 가야 하는데 남자는 ‘개똥벌레’ 노래나 흥얼거리면서 운전만 하는 것이다. 가끔 그는 ‘옥경이’라고 여자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여자의 말에 대꾸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달리는 차의 문 손잡이를 잡고 뛰어내리려고까지 한다.
세 번째 단편영화 … 뮤직비디오 감독으로도 데뷔
‘나도 모르게’는 새로운 형식의 영화는 아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는 불친절하지만 낯설지 않다. 유지태의 작가적 상상력이 독창적이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 사이의 불화를 짐작하고 그 원인을 알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여자의 모습이 환상 또는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옛 연인의 집에 찾아가 옥경이를 찾는 남자의 표정은 스스로도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옛 연인의 집을 찾아서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이제는 없는 연인의 이름을 말한다. 유지태 감독은 대중친화적인 영화보다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시공간을 뒤흔들며 시간적 연속성에 도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창조적 상상력은 아직 세련된 기교를 동반하지 못하고 상상력의 폭도 제한돼 있다.
하지만 감독 유지태는 이제 낯설지 않다. 이미 그는 자신의 단편영화를 두 편이나 공개했다. ‘나도 모르게’는 그의 세 번째 단편 작품이다. 러닝타임 24분의 이 영화는 1998년 ‘바이 준’으로 데뷔한 유지태의 영화인생 10년째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 10년 동안 유지태는 모델 출신 배우에서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거듭났고, 이제 자신의 창조적 세계를 찾아가는 감독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바이 준’에서 김하늘과 공연한 유지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배우가 이렇게 성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기다란 막대기처럼 뻣뻣했고 감정표현이 낯설었으며 모든 동작이 어색했다.
단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유지태는 ‘바이 준’을 거쳐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으로 주목받는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주유소를 습격해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갈취하는 이 영화에서 유지태는 ‘뻬인트’ 역을 맡아 엉뚱한 웃음을 안겨줬다. 아직 감정표현에 익숙지 않던 신인인 그로서는 행운의 배역이었고, 이후 ‘리베라 메’ ‘동감’(2000년)을 거치며 대중적 지명도를 넓혀나가면서 조금씩 연기력까지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반짝하는 스타보다는 대기만성형 배우다.
유지태가 한 사람의 배우로 재탄생한 것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년)부터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에서 그는 사랑에 빠져들었다가 갈등하고 흔들리며 이별하는 남자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배우 유지태의 의심할 바 없는 대표작은 ‘올드보이’(2003년)다. 박찬욱 감독의 이 영화에서 그는 오대수 역의 최민식과 팽팽하게 맞서는 이우진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부유한 도시적 감각의 남자이면서도 상처 많은 이우진의 내면은 유지태를 통해 멋지게 형상화됐다.
대중친화적 작품보다 작가주의 지향
‘올드보이’ 이후 유지태는 ‘남극일기’ ‘야수’ ‘가을로’ ‘뚝방전설’ ‘황진이’ ‘순정만화’ 등 출연작 대부분이 흥행에 참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뚝방전설’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했지만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 유지태는 이제 더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청춘의 아이콘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감독 그리고 제작자로서 조심스럽게 연극과 영화에 대한 애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가 감독한 ‘자전거 소년’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두 편의 단편은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소개됐다. ‘자전거 소년’(40분)은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관객상을 받았고,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42분)는 같은 영화제의 후지필름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동안 그는 자신이 설립한 유무비 제작사에서 ‘육분의 륙’과 ‘귀신의 집으로 오세요’ 등의 연극을 제작했고 출연했다.
연극 제작자, 영화감독으로서 유지태의 행보를 보면, 그는 대중친화적 작품보다는 작품성을 인정받는 작가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에서 알 수 있듯, 미장센은 아직 세련되지 못했고 이야기는 새롭지 못하다. 배우 출신으로서 내 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욕망만으로 좋은 영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연극 연기를 통해 긴 호흡을 익히고, 단편영화를 통해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는 연기에서도 그랬듯 감독으로서도 대기만성형이 아닐까? 지금은 조금 모자라지만 나중에는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때까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한 자세와 꾸준한 노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