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유혹하는 기술이 뛰어난 남성을 일컫는 ‘픽업 아티스트’의 역사는 1990년대 중반 인터넷 게시판에서 처음 시작됐다.
픽업 아티스트 ‘팬케익’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픽업 아티스트는 ‘여자 꼬시는 법’, 즉 유혹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인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요. 바로 진심과 끈기죠. 하지만 다양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문제는 달라지죠.”
픽업 아티스트의 역사는 1994년, 인터넷 태동기에 alt.seduction.fast라는 게시판이 개설되면서 시작됐다. ‘fast’라는 단어는 픽업 아티스트의 성격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재테크로 비유하면 워런 버핏의 가치투자와는 정반대 지점에 자리한다고 할까.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여성을 유혹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알음알음 모여든 남성들이 게시판에 긁적인 글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니 안 되더라’는 한담(閑談)으로 시작해 심리학 생물학 등 각종 이론을 접목하고 유혹의 과정을 패턴화, 프로그램화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칭찬과 유머에 꿈쩍 않으면 깨끗이 포기하는 게 상책
그 속에서 실전과 이론에 탁월한 몇몇에게 ‘픽업 아티스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 대중문화 월간지 ‘롤링 스톤스’의 에디터인 닐 스트라우스가 ‘스타일’이라는 닉네임으로 2년 동안 이들의 노하우를 익혀 픽업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과정을 쓴 ‘THE GAME’이라는 책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다. 책에 등장하는 픽업 아티스트들은 관련 책을 쓰고 유료 세미나를 열어 그들의 속성 유혹법을 만방에 전파하고 있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가 맡았던 역이 바로 픽업 아티스트다. 톰 크루즈는 ‘THE GAME’에 등장하는 ‘미스터리’라는 픽업 아티스트에게 직접 찾아가 역할과 관련한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팬케익’이 픽업 아티스트가 된 계기도 ‘THE GAME’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랑우탄’이라는 닉네임의 동갑내기 친구와 지난해 7월부터 www.kpua.co.kr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닉네임을 쓴다. 그들의 닉네임은 인터넷상의 필명이자 신분을 숨기는 수단이다. “픽업 아티스트라는 게 알려지면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직접 여자들을 유혹하는 시범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그는 필자를 처음 만난 커피숍에서도 “여긴 여자가 너무 많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다.
픽업 아티스트들이 가장 강조하는 건 마음가짐이다. ‘3초 룰’이라는 게 있다. 마음에 드는 여성과 시선을 맞췄다면 3초 안에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 시간을 더 끌면 여성은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남성은 거절당할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다. 그렇다고 무작정 다가가라는 뜻은 아니다. 가장 좋은 건 그녀에 대한 칭찬. 어처구니없는 게 아니라면 칭찬을 싫어할 여자는 없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관찰이 필요하다. 액세서리나 구두를 칭찬하는 건 가장 쉬우면서도 일반적이다. 거기에 약간의 위트가 더해지면 상황은 훨씬 부드러워진다. 단, 여기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낯선 사람의 접근은 어쩔 수 없이 어색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당신의 칭찬과 유머에도 꿈쩍 않는 여자라면 깨끗이 포기하는 게 좋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할 것.
“픽업 아티스트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그녀는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그 가능성 중 하나를 시험했고, 당신의 유머에 반응하지 않은 여성은 유머 감각에 문제가 있거나 성격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픽업 아티스트적’인 마음가짐이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여성에게 말을 걸 때 습관적으로 “곧 가봐야 하지만…” “지금 바쁘긴 하지만…” 등의 말을 한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신호다.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부담을 주지 않는 동시에 당신에 대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몸가짐 또한 중요하다. 자신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야 한다. 어깨를 쭉 펴고, 시선을 똑바로 받고,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띠고 즐겨야 한다. 당신이 상대보다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과시하는 것이다.
얼마 전 국내에 출간된 ‘완벽한 유혹자’라는 유혹 지침서의 저자는 정말 촌스러운 분홍색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에 나가 “최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물려주신 목도린데요, 외할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두르고 나오죠”라는 말로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100명에게 말을 걸어 22명의 연락처를 얻어냈으니(대조군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것이 바로 픽업 아티스트들이 말하는 ‘공작새 이론’이다. ‘나는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렇게 눈에 띄는 차림으로도 주위의 경쟁자들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무언의 제스처. ‘팬케익’도 보라색 벨벳 목도리를 하고 자리에 나왔다. “이거, 오늘 얼마나 많은 여자들 목에 매주는지 한번 보시죠”라며.
어떻게든 대화가 시작되면 가장 중요한 건 잘 듣는 것이다. 상대 여성과 시선을 맞추고 적극적으로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며 그 말을 자기 식으로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잘 듣는 건 잘 말하는 것보다 힘이 세다. 시오노 나나미의 어느 글에서 빌리 와일더가 게리 쿠퍼에 대해 한 말이 있다.
“그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때로 다음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곁들였지.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사이 여자들은 자연히 그에게 몸을 던지게 되는 거야.”
섹스 소재로 한 농담·스킨십도 유용한 도구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픽업 아티스트들의 현장 강의에 참가해 그들의 ‘작업 현장’을 목격한 후 가장 놀란 건 혀를 내두를 만큼 ‘쎈’ 스킨십이었다.
“대화에선 어느 정도 밀고 당기는 게 필요하지만 스킨십은 좀더 원초적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잡아주는 게 중요하죠.”
물론 상대가 꺼릴 때는 바로 그만두는 게 상책이다. 그럴 경우 어색해진 분위기는 적당한 유머로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부단한 준비를 한다. 결국 유혹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며, 근거 있는 자신감은 준비를 통해 생기게 마련이다. 처음 말을 걸 때 써먹을 만한 말을 외우고 온갖 이론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이다. 대화가 끊겼을 때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한 각종 마술과 손금 보는 법을 익히고,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기 위해 최면술을 배우며 여성들이 좋아하는 향수의 리스트를 공유한다.
그런데 잠깐,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이건 분명 최소한의 노력과 시간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방법 아니었나? 필자가 이들의 세미나와 현장 강의에 참여한 뒤 내린 결론은 그렇다. 이들은 여성을 ‘재빨리’ 유혹하는 데 천착하다 그 이론과 방법론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노력을 들인다. 그 결과 여성은 어떤 ‘공략 대상’으로 뭉뚱그려질 뿐이다. 게다가 이런 것은 결국 소수의 경험에 의존한 것일 뿐 검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이들의 이론을 익히고 방법을 활용하는 건 재미있다. 더욱이 실제로 ‘먹힐’ 경우 짜릿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지는 말라. 어디까지나 이들이 말하는 건 ‘속성 유혹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