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보시라이(薄熙來·사진)’ 하면 곧바로 태자당(太子黨)을 떠올린다. 태자당은 중국 고위 관료의 자제로서 당정군의 핵심 요직에 포진한 인사를 말한다. 4000여 명에 이르며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상하이방(上海幇)과 함께 3대 정치권력 계파다.
186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그는 누가 봐도 태자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1908 ~ 2007)의 둘째 아들. 장인 구무(谷牧) 역시 부총리를 지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절친했던 보이보는 3세대 지도부 막후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던 ‘8인 원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장쩌민-후진타오 체제 확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렇다고 올해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그가 아버지 후광으로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보시라이는 아버지 덕분에 곧바로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배치됐다. 하지만 2년 뒤인 1984년 지방 근무를 자청해 랴오닝(遼寧)성의 낙후한 농촌 진(金)현 부서기로 배치됐다. 중앙에서 내려간 그는 지방보호주의를 타파하려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방 세력의 야유와 조롱뿐이었다. 보이보는 좌절하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이렇게 조언했다.
다롄시 12년간 근무하며 ‘선진’지역으로 탈바꿈시켜
“실제 행동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라.”
지방보호주의가 왜 나쁜지를 행동으로 보여줘 다른 사람이 따라오게 하라는 권고였다. 그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다롄(大連)시 상무위원으로 떠날 무렵 다롄시 진저우(金州)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진현은 향진 기업, 가족계획, 교육, 체육, 과학기술 보급 등 10여 개 분야에서 모두 ‘선진’ 지역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시 선전부 부장부터 시 서기까지 12년간 근무한 다롄시는 보시라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다롄이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게 된 것도 보시라이 덕분이다. 다롄시 사람들은 축구와 복장, 보시라이를 합쳐 ‘다롄 삼보(三寶)’라고 일컫는다.
랴오닝 성장으로 재직한 2001~2004년엔 낙후한 랴오닝성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랴오닝성의 사업가 1000명을 대동하고 중국 남부의 잘사는 광둥(廣東)성을 찾아가 상품 전시와 경제협력 상담을 벌이며 벤치마킹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가 추진한 ‘동북진흥’ 정책은 2003년 중앙정부의 국가전략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시골 현 부서기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성장을 거쳐 중앙 상무부장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온 그지만 세상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의 정치적 업적도 관계가 좋은 매체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말이 많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배경엔 그의 업무 스타일과 성격이 있다.
한때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됐지만 지금은 기세 한풀 꺾여
한밤중에도 부하를 찾아 업무를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장기다. ‘심야에 휴대전화로 찾기(半夜機叫)’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각종 행사와 접견 등으로 근무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전화로 부하를 찾는 일이 많았다. 혹시나 전화를 받지 못한 간부에겐 불호령이 내려졌다. 그는 밤 11시 이전에는 절대 휴대전화를 꺼놓지 말 것을 지시했다. 11시 이전에 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하는 간부에게는 “업무가 적어 그렇게 빨리 자느냐”며 다른 일을 추가로 안겼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랴오닝 성장 재직시절엔 업무에 간섭하는 원스전(聞世震) 당서기에게 “나는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봐라”며 행정업무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화가 난 원 서기가 중앙에 올라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래선지 그가 2004년 랴오닝 성장을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조차 불참해 썰렁한 분위기였다.
중국에서는 벼슬길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다롄 시장으로 근무하던 1993년 홍콩의 한 기자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다롄 시장에 임명된 게 아버지 덕분 아닌가요?”
그는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데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생산력 발전을 중시하는 덩샤오핑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1966년 주자파로 몰려 문화혁명 기간 5년 동안 노동학습반에 들어가 강제노동에 시달린 과거를 털어놓으며 시련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 시련 때문에 자유와 민주,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 초 보이보가 99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 후광이 사라지는 것 같다. 3년 전 그가 상무부장에 임명됐을 때는 차기 총리감은 보시라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제부총리 물망에도 오르지 않고 있다. 그는 내년 초 왕양(汪洋) 충칭시 서기가 광둥성 서기로 옮기면 그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왕양 서기는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로 보 상무부장보다 여섯 살 어리다.
현재 58세인 그는 4세대 지도자도 5세대 지도자도 아닌 4.5세대 지도자다.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다 해도 2017년엔 나이가 68세가 돼 5년 만에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올해 초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영안실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사라진 지금 그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지 주목된다.
186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그는 누가 봐도 태자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1908 ~ 2007)의 둘째 아들. 장인 구무(谷牧) 역시 부총리를 지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절친했던 보이보는 3세대 지도부 막후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던 ‘8인 원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장쩌민-후진타오 체제 확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렇다고 올해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그가 아버지 후광으로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보시라이는 아버지 덕분에 곧바로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배치됐다. 하지만 2년 뒤인 1984년 지방 근무를 자청해 랴오닝(遼寧)성의 낙후한 농촌 진(金)현 부서기로 배치됐다. 중앙에서 내려간 그는 지방보호주의를 타파하려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방 세력의 야유와 조롱뿐이었다. 보이보는 좌절하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이렇게 조언했다.
다롄시 12년간 근무하며 ‘선진’지역으로 탈바꿈시켜
“실제 행동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라.”
지방보호주의가 왜 나쁜지를 행동으로 보여줘 다른 사람이 따라오게 하라는 권고였다. 그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다롄(大連)시 상무위원으로 떠날 무렵 다롄시 진저우(金州)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진현은 향진 기업, 가족계획, 교육, 체육, 과학기술 보급 등 10여 개 분야에서 모두 ‘선진’ 지역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시 선전부 부장부터 시 서기까지 12년간 근무한 다롄시는 보시라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다롄이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게 된 것도 보시라이 덕분이다. 다롄시 사람들은 축구와 복장, 보시라이를 합쳐 ‘다롄 삼보(三寶)’라고 일컫는다.
랴오닝 성장으로 재직한 2001~2004년엔 낙후한 랴오닝성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랴오닝성의 사업가 1000명을 대동하고 중국 남부의 잘사는 광둥(廣東)성을 찾아가 상품 전시와 경제협력 상담을 벌이며 벤치마킹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가 추진한 ‘동북진흥’ 정책은 2003년 중앙정부의 국가전략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시골 현 부서기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성장을 거쳐 중앙 상무부장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온 그지만 세상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의 정치적 업적도 관계가 좋은 매체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말이 많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배경엔 그의 업무 스타일과 성격이 있다.
한때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됐지만 지금은 기세 한풀 꺾여
한밤중에도 부하를 찾아 업무를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장기다. ‘심야에 휴대전화로 찾기(半夜機叫)’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각종 행사와 접견 등으로 근무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전화로 부하를 찾는 일이 많았다. 혹시나 전화를 받지 못한 간부에겐 불호령이 내려졌다. 그는 밤 11시 이전에는 절대 휴대전화를 꺼놓지 말 것을 지시했다. 11시 이전에 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하는 간부에게는 “업무가 적어 그렇게 빨리 자느냐”며 다른 일을 추가로 안겼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랴오닝 성장 재직시절엔 업무에 간섭하는 원스전(聞世震) 당서기에게 “나는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봐라”며 행정업무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화가 난 원 서기가 중앙에 올라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래선지 그가 2004년 랴오닝 성장을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조차 불참해 썰렁한 분위기였다.
중국에서는 벼슬길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다롄 시장으로 근무하던 1993년 홍콩의 한 기자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다롄 시장에 임명된 게 아버지 덕분 아닌가요?”
그는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데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생산력 발전을 중시하는 덩샤오핑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1966년 주자파로 몰려 문화혁명 기간 5년 동안 노동학습반에 들어가 강제노동에 시달린 과거를 털어놓으며 시련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 시련 때문에 자유와 민주,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 초 보이보가 99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 후광이 사라지는 것 같다. 3년 전 그가 상무부장에 임명됐을 때는 차기 총리감은 보시라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제부총리 물망에도 오르지 않고 있다. 그는 내년 초 왕양(汪洋) 충칭시 서기가 광둥성 서기로 옮기면 그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왕양 서기는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로 보 상무부장보다 여섯 살 어리다.
현재 58세인 그는 4세대 지도자도 5세대 지도자도 아닌 4.5세대 지도자다.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다 해도 2017년엔 나이가 68세가 돼 5년 만에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올해 초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영안실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사라진 지금 그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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