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전작에서 피노키오 분장을 했던 로베르토 베니니 아저씨는 너무한 면이 있었다. 깡마른 체격과 장난기어린 두 눈, 거짓말과 창의력을 혼동하는 ‘아저씨’ 피노키오는 할아버지가 랩댄스 추는 격이요, 1t짜리 아가씨가 신데렐라가 된 격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어린이의 꿈이 늘 어른들의 음흉함으로 부서지는 세상을 그린 ‘피노키오’는 잔혹동화다. 자신의 흥행작 ‘인생은 아름다워’ 제작비의 3배가 들었지만, 베니니의 피노키오는 대중에게 외면당했고 평단은 차가웠다.
이제 베니니는 성공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엇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아카데미 외국어상까지 받은 ‘인생은 아름다워’를 전략적으로 반복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동화와 사랑을 집어넣고 휴머니즘으로 휘휘 저으면, 여러분은 눈이 오는데도 호랑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자매편 성격… 웃음과 감동 한마당
‘호랑이와 눈’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자매편 같은 영화다. 전작에서 아들을 구하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 수용소에서 어린 아들과 거짓말 놀이를 했던 베니니는 이번엔 이라크 전쟁 취재를 나섰다. 부상을 당하지만, 의식불명인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바그다드로 향한다. 전쟁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족애가 있고, 여기에 베니니의 수다까지 판박이다.
다만 ‘호랑이와 눈’에는 전작에 없던 ‘시’의 운율이 더해졌다. 분명 이건 피노키오류의 단순한 수다는 아니다. 베니니가 분한 아틸리오는 시를 가르치는 교수. 이 때문에 그의 꿈도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달빛이 비추는 폐허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톰 웨이츠가 피아노를 치며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네(You can never hold back spring)’를 부른다. 사포를 100여 개는 삼킨 듯한 허스키 보이스는 결혼식 축가를 부르기엔 턱도 없는 듯하지만, 톰 웨이츠가 부르니 은근히 낭만적인 맛이 난다. 그런 가운데 신부는 신랑에게 이렇게 사랑의 시를 읊는다. “그대 이름 노래하면 낙원의 문이 열리네. 밤하늘의 황금혜성처럼 내 입에서 뛰쳐나오는 말, 사랑합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눈’은 보는 영화인 동시에 듣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어가 프랑스어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사실. 특히 그가 이라크의 한 의사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 비토리아가 얼마나 소중한지 눈을 반짝이며 고백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비토리아가 죽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닫히고 별들은 나사가 빠져 떨어지며, 하늘은 말라서 트럭 뒤에 처박히고 햇빛은 빛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카펫, 기둥, 집, 모래, 바람, 개구리, 달콤한 과일 그 모든 것을 가져가도 그녀만은 남겨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듣고, 이탈리아어를 알 리 없는 이라크 의사는 마술처럼 잊어버렸던 글리세린 제조법을 기억해낸다. 모든 언어의 장벽을 넘는 시의 힘, 베니니의 말대로 그 순간 그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물기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진심을 시어로 노래하는 베니니의 얼굴은 관객들 마음에 뿌리 깊은 잔상을 남긴다. 익살스런 웃음보다 한 뼘 더 깊은 진정성-사랑, 우정, 가족애를 희구하는 그의 염원에 관객도 함께 손을 포개게 된다.
물론 베니니는 여전히 평화라는 현수막에 부딪혀 넘어지고, 계단을 오르다 엎어지며 캥거루처럼 깡충깡충 뛰기도 한다. 전쟁터에 가서도 좌충우돌 산소통을 훔쳐오고, 자전거로 비틀비틀 미군과 맞닥뜨린다. 앞뒤 가릴 것 없는 전형적인 몸 개그, 슬랩스틱인데 가만히 보면 채플린보다는 더 직접적이고 버스터 키튼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편이다.
아마도 베니니의 세계가 그려내는 웃음의 본질은 여전히 파리채를 꺼내 대량학살 무기라고 휘두를 때의 그 천연덕스러움이 낙관으로 변모하는 순간에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해도 베니니는 오히려 세상을 바꾸지 말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어려운 수용소 생활도 마음을 바꾸면 일종의 게임으로 달리 보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랑하는 여자도 지극정성을 다하면 기적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베니니의 영화는 사회적인 어떤 것과 불화(不和)한다. 듣고 웃는 영화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코미디언인 베니니의 순발력과 뛰어난 각본가 빈센조 세라미 덕에 이 영화 역시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럼에도 ‘호랑이와 눈’은 동화적인 휴머니즘을 믿는 베니니식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현실의 틈입은 기껏해야 갑자기 꿈속 결혼식의 불청객인 주차 단속원과 몇 명의 머리 빈 미군이 전부다(이상하지 않는가? 이 기이한 이라크전 영화에서 제대로 된 이라크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순진한 이상주의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실 이라크전과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은 매일 밤 CNN을 통해 전 세계가 뉴스를 공유하는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화두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 것인가 세계인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선교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논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라크 어린이들의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지뢰를 소재로 웃음을 선사하려는 베니니의 노력은 다소 무리한 구석이 있다. 왜 이즈음의 베니니는 이런 동화의 테두리에서 안온하게 머무는가.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대담한 웃음을 선사하며 이탈리아 사회를 풍자했던 ‘미스터 몬스터’의 패기는 어디 갔을까.
‘호랑이와 눈’은 ‘피노키오’ 이후 베니니가 만들어낸 또 다른 동화적 세상의 결정판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이라크 버전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천일야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 그러므로 이번에도 베니니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 것 같다. 머나먼 이국땅까지 가서 어떤 모험도 불사했던 사내의 얼굴이 여전히 피노키오 같으니 말이다.
착한 판타지 ‘호랑이와 눈’. 그렇다면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를 제치고 전 이탈리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베니니의 상업적 의도도 좀더 참하고, 좀더 착해야 되는 게 아닐까?
이제 베니니는 성공해야만 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엇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아카데미 외국어상까지 받은 ‘인생은 아름다워’를 전략적으로 반복한다. 유행가 가사처럼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동화와 사랑을 집어넣고 휴머니즘으로 휘휘 저으면, 여러분은 눈이 오는데도 호랑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자매편 성격… 웃음과 감동 한마당
‘호랑이와 눈’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자매편 같은 영화다. 전작에서 아들을 구하려 제2차 세계대전 한복판 수용소에서 어린 아들과 거짓말 놀이를 했던 베니니는 이번엔 이라크 전쟁 취재를 나섰다. 부상을 당하지만, 의식불명인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바그다드로 향한다. 전쟁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가족애가 있고, 여기에 베니니의 수다까지 판박이다.
다만 ‘호랑이와 눈’에는 전작에 없던 ‘시’의 운율이 더해졌다. 분명 이건 피노키오류의 단순한 수다는 아니다. 베니니가 분한 아틸리오는 시를 가르치는 교수. 이 때문에 그의 꿈도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달빛이 비추는 폐허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톰 웨이츠가 피아노를 치며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네(You can never hold back spring)’를 부른다. 사포를 100여 개는 삼킨 듯한 허스키 보이스는 결혼식 축가를 부르기엔 턱도 없는 듯하지만, 톰 웨이츠가 부르니 은근히 낭만적인 맛이 난다. 그런 가운데 신부는 신랑에게 이렇게 사랑의 시를 읊는다. “그대 이름 노래하면 낙원의 문이 열리네. 밤하늘의 황금혜성처럼 내 입에서 뛰쳐나오는 말, 사랑합니다.”
그래서 ‘호랑이와 눈’은 보는 영화인 동시에 듣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탈리아어가 프랑스어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사실. 특히 그가 이라크의 한 의사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 비토리아가 얼마나 소중한지 눈을 반짝이며 고백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비토리아가 죽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닫히고 별들은 나사가 빠져 떨어지며, 하늘은 말라서 트럭 뒤에 처박히고 햇빛은 빛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카펫, 기둥, 집, 모래, 바람, 개구리, 달콤한 과일 그 모든 것을 가져가도 그녀만은 남겨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을 듣고, 이탈리아어를 알 리 없는 이라크 의사는 마술처럼 잊어버렸던 글리세린 제조법을 기억해낸다. 모든 언어의 장벽을 넘는 시의 힘, 베니니의 말대로 그 순간 그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물기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진심을 시어로 노래하는 베니니의 얼굴은 관객들 마음에 뿌리 깊은 잔상을 남긴다. 익살스런 웃음보다 한 뼘 더 깊은 진정성-사랑, 우정, 가족애를 희구하는 그의 염원에 관객도 함께 손을 포개게 된다.
물론 베니니는 여전히 평화라는 현수막에 부딪혀 넘어지고, 계단을 오르다 엎어지며 캥거루처럼 깡충깡충 뛰기도 한다. 전쟁터에 가서도 좌충우돌 산소통을 훔쳐오고, 자전거로 비틀비틀 미군과 맞닥뜨린다. 앞뒤 가릴 것 없는 전형적인 몸 개그, 슬랩스틱인데 가만히 보면 채플린보다는 더 직접적이고 버스터 키튼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편이다.
아마도 베니니의 세계가 그려내는 웃음의 본질은 여전히 파리채를 꺼내 대량학살 무기라고 휘두를 때의 그 천연덕스러움이 낙관으로 변모하는 순간에 있을 것이다. 역경에 처해도 베니니는 오히려 세상을 바꾸지 말고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어려운 수용소 생활도 마음을 바꾸면 일종의 게임으로 달리 보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랑하는 여자도 지극정성을 다하면 기적을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베니니의 영화는 사회적인 어떤 것과 불화(不和)한다. 듣고 웃는 영화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코미디언인 베니니의 순발력과 뛰어난 각본가 빈센조 세라미 덕에 이 영화 역시 보는 이의 마음을 두드리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그럼에도 ‘호랑이와 눈’은 동화적인 휴머니즘을 믿는 베니니식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반복하는 데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현실의 틈입은 기껏해야 갑자기 꿈속 결혼식의 불청객인 주차 단속원과 몇 명의 머리 빈 미군이 전부다(이상하지 않는가? 이 기이한 이라크전 영화에서 제대로 된 이라크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순진한 이상주의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실 이라크전과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은 매일 밤 CNN을 통해 전 세계가 뉴스를 공유하는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화두다.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 것인가 세계인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선교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논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라크 어린이들의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지뢰를 소재로 웃음을 선사하려는 베니니의 노력은 다소 무리한 구석이 있다. 왜 이즈음의 베니니는 이런 동화의 테두리에서 안온하게 머무는가.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대담한 웃음을 선사하며 이탈리아 사회를 풍자했던 ‘미스터 몬스터’의 패기는 어디 갔을까.
‘호랑이와 눈’은 ‘피노키오’ 이후 베니니가 만들어낸 또 다른 동화적 세상의 결정판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이라크 버전이거나, 그도 아니라면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한 ‘천일야화’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 그러므로 이번에도 베니니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 것 같다. 머나먼 이국땅까지 가서 어떤 모험도 불사했던 사내의 얼굴이 여전히 피노키오 같으니 말이다.
착한 판타지 ‘호랑이와 눈’. 그렇다면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를 제치고 전 이탈리아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베니니의 상업적 의도도 좀더 참하고, 좀더 착해야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