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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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자유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7-09-05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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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자유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가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로 물러났던 게 1998년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도 채 안 된 지금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오히려 수하르토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어지면서 ‘혼란스러운 민주주의 체제’보다는 ‘안정된 독재정치’가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자에 대한 향수는 흔히 후진국형 현상으로 얘기된다. 칠레나 필리핀에서도 피노체트, 마르코스에 대한 향수는 높다. 그런데 이를 후진국의 사정이나 자유의지가 약한 이들의 피학 증세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누군가는 이렇게 절규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자유를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지고의 가치로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는 대가로 자유를 스스로 유보하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것은 지금도 상당 부분 유효하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그릴 때 흔히 동원되는 소재는 교도소 탈주 이야기다.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사진) 주인공들에겐 절망적인 상황에서 굴하지 않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있다. 이들에겐 그야말로 자유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19년간 한 번도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결국 탈옥에 성공한다. 그러나 빠삐용이나 앤디(쇼생크 탈출)가 자유를 찾아 탈주를 꿈꿀 때, 빠삐용과 앤디의 동료에게 자유란 오히려 피하고 싶은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앤디의 동료인 노인 죄수 브룩스는 앤디보다 3배 가까운 세월 동안 자유를 박탈당했으면서도 사회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되레 그는 형무소에 남기 위해 동료를 칼로 위협하고 위해하려던 것이 실패해 출옥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가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건 아닐 것이다. 다만 그가 가진 삶의 조건의 불확실성이 자유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앤디와 브룩스 중 어느 쪽이 보편적인 인간일까. 물론 이렇게 묻는 것은 옳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앤디와 브룩스를 둘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실한 은행원이던 앤디가 초인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일면인 것처럼 브룩스도 우리의 한 부분이다. 다만 그 양면성을 인정하면서도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어느 쪽이 인간의 품위에 더 어울리는가. 그 답은 조금 더 분명하지 않는가.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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