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경기도 수원에서 보험금을 노려 부모를 살해하고 누나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피의자.
이날 오전 3시40분, 이씨는 수원시 장안구 자신의 집에서 군용 복면을 쓰고 괴한으로 위장, 잠자고 있던 부모와 누나 2명 등 일가족 4명을 흉기로 수차례 찔렀다. 자신을 알아본 부친이 “·#52059;·#52059;아, 그만 해라”라고 울부짖었지만 그는 범행을 멈추지 않았다. 부부는 숨졌고 누나들도 중상을 입었다.
이씨는 오래전부터 이날의 거사(?)를 준비했다. 목적이 돈이었던 만큼 지난달에는 가족 명의로 3억6000만원 상당의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에도 가입했다. 완전범죄를 위해 옷과 장갑도 미리 준비했다. 그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빚이 많고 가정형편도 어려웠다”고 범행동기를 밝혔다.
범행 이후 이씨의 행동은 차분했다. 아버지가 이송된 병원에 찾아와선 “친구와 함께 있다가 친척에게서 연락을 받았다”며 수술동의서를 쓰는 등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수사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씨가 병원에 왔을 때 우리는 이미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씨가 의사 손을 잡은 채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자 그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아버지 살려달라” 범행 후 태연한 행동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짐. 또는 그런 현상.’ ‘패륜’의 사전적 의미다. 인터넷에서 ‘패륜’을 검색하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이어진다. 보험금을 노린 부모 살해범, 2년 전 부모형제와 두 남편을 차례로 죽인 엄모 여인, 장애부모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30대 가장, 2000년 5월 세상을 경악시켰던 부모 토막살해사건….
패륜범죄가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통계는 없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패륜범죄가 벌어지는 곳이 우리나라일 것”이라고 개탄한다. 가족해체, 물질만능주의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고 사회구조적 병폐라는 분석도 나온다. 패륜범죄, 과연 어디까지 온 것일까.
‘패륜’범죄의 원조는 1994년 발생한 한약사 부부 피살사건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범인은 살해된 부부의 장남 박한상(당시 23세) 씨였다. 13년 전 벌어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났던 박씨는 도박 등으로 3000여 만원의 빚을 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화를 내며 박씨에게 귀국을 종용했고, 부모와의 갈등은 점점 커졌다. 결국 박씨는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부모를 살해해 100억원대 유산을 상속받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귀국과 동시에 범행을 준비했다. 살인을 저지른 뒤에는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집안 곳곳에 불을 질렀다.
당시 이 사건이 가져다준 충격은 대단했다. 뿌리 깊은 유교문화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범죄였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소개되는 계기도 됐다. 사이코패스는 ‘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를 말한다.
지난해 4월 수원에서 일어난 40대 주부 살해사건도 대표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이자 패륜범죄였다. 수원의 한 가정집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처음에는 4인조 강도살인 사건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아들 김모(26) 씨가 범인임이 드러났다. 살해동기는 카드빚 400만원. 김씨는 친구들과 모친을 살해, 모친 명의의 집을 팔아 나눠갖기로 공모했다. 범행 직후 김씨는 모친의 시신 곁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엽기 행태도 보였다. 밤늦게 귀가한 여동생이 신고하지 못하게 친구들과 여동생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한효성 수원중부경찰서 강력팀장은 이렇게 회상한다.
“김씨는 처음부터 모친을 살해할 목적으로 친구들과 공모했다. 여동생을 성폭행한 것도 미리 짜여진 각본이었다. 그는 수사과정에서도 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가족이 자신에게 해준 게 무엇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이런 괴물이 생겨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1994년 발생한 한약사 부부 피살 사건의 범인 박한상(당시 23세)의 현장검증.
하지만 부모를 죽였다고 해서 모든 범죄에 ‘패륜’이라는 딱지가 붙진 않는다. 전문가들은 살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차이가 크다고 강조한다. 특히 지속적인 가정폭력이나 무관심 등이 살인으로 이어진 경우는 패륜의 범주에 넣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2000년 5월 발생한 ‘부모 토막살해사건’(일명 이은석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씨(당시 24세)는 살해된 부부의 차남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 밥을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만화를 그린다고 머리카락을 잡아뜯는 식의 폭력이었다. 이씨의 부모는 늘 남들과 비교했고 성적,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광적인 히스테리와 폭력을 행사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씨는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수석으로 명문 K대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집에 틀어박혀 비디오와 게임에만 몰두했다. 부모와의 대화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살해를 저지르기 열흘 전 그는 마지막 대화에서 단절을 느낀 이후 살인을 결심했다. 이씨는 사건 직후 경찰서 진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며 울먹였다.
학대에 기인한 존속살인, 금전 목적 범죄와 달라
전문가들은 이은석을 사이코패스, 패륜범죄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학대에 기인한 존속살해는 금전 획득 같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범죄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의 설명이다.
“이은석 사건의 경우 살인이 곧 범죄의 목적이었다. 부모를 살해해야 하는 자신만의 긴박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다. 반면 박한상 사건이나 수원 부모 살해사건은 금전 획득을 위한 살인이었다. 이들에게 살인은 그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증상이라 할 수 있다.”
패륜범죄에 살인사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간에 벌어지는 폭행, 특히 성폭행 범죄는 어쩌면 살인보다 더 심각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발표한 2006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상담건수(2317건) 중 무려 15.5%(360건)가 가족에 의한 성폭행이었다. 특히 시효가 지난 뒤 상담을 요청하는 사례(61.5%)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성폭력상담소의 한 관계자는 “가족에 의한 성폭행의 경우 일단 신고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가정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에 알면서도 감추는 사례가 많다. 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폭행이 많다는 점도 신고를 어렵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가정 내 성폭행 문제를 윤리라는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족이라 해도 범죄라는 면에서 엄격하게 단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고하지 않은 가족간 성폭행 범죄 훨씬 심각
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에는 가정 내 성폭력으로 고통받은 한 피해자의 수기가 올라와 있어 관심을 끈다. 자신을 ‘수(水)’라고 소개한 20대 여성의 사연에 많은 사람들은 절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다음은 사연의 한 대목.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집을 나와 살면서 가시처럼 박힌 기억들이 날 아프게 했다. 내 기억들, 상처라 부르는 지점들을 정리해보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울었다. 내가 겪은 일인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무섭고 따갑고 아팠다. 그런데 내가 울면서 위로해줄 때 조금은 편해지는 기억들을 볼 수 있었다. 편하게 힘들어하고, 아파하면서 풀어낼 수 있을 때 그 기억들은 상처가 아닌 기억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 같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기억 중 하나로 말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 그 기억들이 있어도 나 자신이 싫지 않고, 밉지 않고, 같이 갈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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