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브루크 애스터 여사.
13일 폐렴이 악화돼 105세로 별세한 그녀의 별명은 ‘비공식 뉴욕시 퍼스트레이디’였다. 박애주의자이자 뉴욕 문화계 명사인 애스터 여사는 수십 년 동안 뉴욕시 곳곳을 누비며 자선활동을 했다. 또 뉴욕공립도서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카네기홀 등 뉴욕 명소는 물론 가난한 흑인 밀집 거주지역인 할렘의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돈을 쾌척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기부하기 전 직접 꼼꼼하게 용도를 검토하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었다.
수십년간 뉴욕 어려움 돌봐 … 105세로 영면
애스터 여사가 사망하자 생전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뉴욕 명소와 건물 곳곳에 줄줄이 조기가 걸렸다.
애스터 여사가 이처럼 뉴욕에서 ‘자선의 여왕’으로 칭송받게 된 것은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부호 빈센트 애스터가 2억 달러(약 1900억원)의 유산을 남기며 “좋은 일에 써달라”고 유언했기 때문. 사망 직전 남편은 애스터 여사에게 “자선활동을 하면 아마 재미있을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빈센트 애스터는 존 록펠러,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에 이어 미국 역사상 세 번째 부자로 꼽히는 모피사업가 존 제이콥 애스터의 고손자다. 해병대 장교의 딸로 태어난 애스터 여사는 16세에 첫 결혼을 했지만 10년 만에 이혼한다. 이혼 사유는 남편의 폭력과 간통 행위. 그 뒤 증권 브로커와 재혼했으나 사별하고 잡지사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세 번째 남편인 빈센트를 만났다.
애스터 여사는 남편의 유산 대부분이 뉴욕 일대 부동산 사업을 통해 형성된 만큼 자선활동도 뉴욕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또 평소 “돈은 거름과 같아서 여기저기 뿌려줘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애스터 여사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지난해 말 손자 필립 마셜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오줌 냄새 나는 소파에 재우는 등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대신 할머니 재산을 이용해 자기 재산만 늘리고 있다”며 소송을 냈다. 이 같은 손자의 주장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애스터 여사를 아끼는 많은 뉴요커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