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축제가 열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마린스키 극장은 ‘마리아의 극장’이라는 뜻으로, 황제(차르)가 황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서커스극장이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이다. 마린스키 극장은 1860년 10월2일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를 위한 목숨’으로 처음 처음 열었으니, 14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페라 극장인 셈이다. 이 마린스키 극장의 페스티벌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프로그램이 바로 백야축제다.
7월 초 모스크바에서 제13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수상자 발표와 수상식, 그리고 파이널 콘서트를 본 뒤 다음 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했다. 이번 러시아 여행은 모스크바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백야축제를 감상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표 음악 행사 2개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보통 행운이 아니다.
원래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스폰서 등의 문제로 이번엔
5년 만에 열렸다.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피아노 부문 심사위원에 백건우, 바이올린 부문 심사위원에 김남윤이 참가하고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4위, 바이올린 부문에 윤현수가 5위를 수상하는 등 한국 음악인들의 높아진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이후 나는 매년 한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에는 찾지 못했는데, 2년 사이 러시아가 무척 많이 변해 깜짝 놀랐다. 푸틴 대통령 치세에 러시아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변한 줄은 몰랐다. 거리뿐 아니라 사람들의 옷매무시와 표정도 밝고 희망적으로 변해 있었다.
1_ 러시아 민속악기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노래하고 있는 바리톤 바실리 게렐로(가운데).<br>2_ 5년 만에 열린 제13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br>3_ 러시아 황실극장인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발레 ‘해적’.
최고의 출연진과 무대, 다양한 레퍼토리에 가슴 뭉클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
이번 백야축제에서 주목받은 프로그램은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였다. 구소련 시절 망명해 소비에트 당국으로부터 비판받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오페라와 발레 ‘봄의 제전’ ‘불새’ 같은 프로그램이 공연된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또 마린스키 극장이 배출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테너 블라디미르 갈루진, 바리톤 바실리 게렐로 같은 오페라 스타는 물론, 발레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등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뛰어난 예술적 기량을 자랑했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판 ‘라 트라비아타’로 세계적 스타가 된 안나 네트렙코는 이번 백야축제에서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 역을 노래했다. 이 밖에 마린스키 오페라 출신의 대형 소프라노 마리아 굴레기나 등 많은 별들이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 밤베르크 심포니, 빈 필의 솔로이스츠들과 호흡을 맞췄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해마다 이 축제 기간에 아무도 모르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매일 밤 오페라와 발레 속으로 푹 빠져들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실제로 세계의 다양한 여름축제 가운데 매일 오페라와 발레를 바꿔가며 공연하는 것은 백야축제가 유일하다. 올해는 5월18일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호반쉬나’로 두 달간의 축제가 활짝 문을 열었고, 7월15일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발레 ‘세헤라자데’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불새’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7월2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마린스키 콘서트홀로 달려갔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널찍한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고, 지금까지 러시아에서는 보지 못한 스타일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도 독특했다. 동선이 편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일단 극장 내부로 들어가면 1층부터 4층까지 전 객석이 이어졌다. 또 무대와 객석이 매우 가깝고 구분도 없어 연주자를 가까이서 접하는 듯한 따뜻한 느낌을 줬다. 게다가 내부가 거의 목재로만 만들어져 어쿠스틱한 느낌이 좋았다. 이날 밤 공연은 마린스키 오페라단의 간판 바리톤으로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옐레츠키 공작 역으로 유명해진 우크라이나 출신 바리톤 바실리 게렐로의 독창회였다. 전반부는 파벨 부벨니코프가 지휘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오페라 아리아 무대. 세계 유수의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하는 바리톤답게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의 마지막 독백 ‘배신자여’와 ‘리골레토’ ‘궁정 가신들아’, 그리고 ‘돈 카를로’ 중 로드리고의 ‘최후의 독백’ 등을 단단하게 불러냈다.
2부에서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자리를 러시아 민속악기 오케스트라가 차지했다. 지휘자도 블라디미르 포포프로 바뀌었다. 턱시도를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게렐로는 청중에게 “이제 아리아는 부르지 않으니까 긴장 풀고 즐기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러시아 민요 ‘두 대의 기타’ ‘머나먼 길’ 같은 뜨겁고 신나는 곡들이 이어졌고, 객석에는 흥겨운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7월3일에는 발레 ‘해적’을, 4일에는 발레 ‘돈 키호테’를 마린스키 극장에서 감상했다. 마린스키 발레의 ‘돈 키호테’는 정말 화려했다. 여기가 스페인인가 싶을 정도로 마린스키 발레단원들은 컬러풀한 남국 색채의 민쿠스 음악에 맞춰 마음껏 기량을 선보였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러시아는 예술 분야에서만 강국이었다. 하지만 이제 러시아는 경제력을 등에 업은 문화예술 강국이 됐다. 2008년에는 과연 얼마나 더 멋지고 환상적인 축제를 만들어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번 러시아 예술기행에서 나는 러시아의 아름다운 예술만 본 것이 아니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그들의 희망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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