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반대시위(1964년)로 구속돼 재판받는 이명박(오른쪽에서 세 번째).
“튼튼하게 자라게 해주십시오.”
가족 중에서 ‘제일 못생겼다’는 말을 듣고 자란 그는,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김밥, 아이스케키, 풀빵 장사…. 겨우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매정하게 말했다.
“우리 형편에 너까지 고등학교에 보내기 어려우니 장사나 해라! 장사해서 형을 도와야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 어린 시절 그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의 편애, 형에 대한 경쟁심, 못생긴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강하게 각인됐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집안을 책임진 가장이자 고교 진학 여부를 결정짓는 절대자였고, 나아가 운명을 가름하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이 후보에게 어머니는 형만 편애하는 원망의 대상인 동시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상이었다. 우주의 중심처럼 자식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어머니, 그게 바로 ‘어머니 콤플렉스’다.
이 후보는 어머니, 박 후보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 강해
이 후보 가족사(史)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아버지의 부재’다. 이 후보의 자서전이나 인터뷰, 기고문을 보면 어머니는 중심부를 차지하는 반면, 아버지는 늘 주변부나 시야 밖에 존재한다. 한 측근이 농반 진반으로 밝힌 이유가 흥미롭다. 1945년 광복 후 이 후보 가족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해탄에서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아버지는 바다에 빠진 가족을 내버려둔 채 배 앞머리로 올라가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을 향해 “여러분 정신차리고 질서를 지킵시다!”라고 외쳤다. 가족보다 승객의 안전을 챙긴 아버지를 탓할 순 없다. 그러나 어린 명박의 마음속에는 여느 보통 아버지와 다른 아버지상이 각인됐을 것이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인가. 군인 출신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이순신’ ‘나폴레옹’ ‘플루타르크 영웅전’ 같은 전쟁소설을 탐독하더니, 그의 초등학생 딸도 ‘삼국지’ ‘삼총사’ 같은 무협소설을 좋아했다. 여학생답지 않게 승부욕이 강해 ‘삼국지’의 뭇 장수들을 흉내내며 나뭇가지를 휘두르던 개구쟁이였다. 훗날 “나의 첫사랑은 조자룡”이라 할 만큼 조자룡에 푹 빠졌고, 알렉산드르 뒤마의 ‘삼총사’에 등장하는 무사 달타냥의 열성 팬이기도 했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1979년 새해 첫날 청와대 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한 박근혜.
아버지의 후광을 거론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영원한 국모(國母)’ 이미지다. 어머니가 총격으로 피살됐을 때 박 후보가 겪은 정신적 충격(trauma)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버지마저 피살된 이후의 비참한 삶과 두 동생의 험난한 삶을 보면 ‘가족 잔혹사’라 할 만하다. 따라서 박 후보의 리더십, 안정적인 지도자 이미지와 공주 스타일, 검증 공방과정에서 드러난 의혹 등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려면 그의 가족 콤플렉스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의 수제자이자 콤플렉스 이론의 원조인 칼 융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성장과정에서의 경험에 의해 콤플렉스를 갖게 되며, 이는 훗날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한때 콤플렉스 심리학으로 명명됐던 그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시절의 가난, 낮은 학력, 부모의 사망, 충격적인 사건 같은 체험이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훗날 성인이 됐을 때 부지불식간 튀어나온다.
이 후보에게 어머니 콤플렉스는 리더십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의 성공신화와 부(富)의 축적, 최근 부동산 의혹사건의 이면에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어머니로 말미암아 이 후보가 체득한 것은 목표지상주의였다. 극도의 가난을 극복하고 형들보다 더 성공해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말겠다는 굳센 각오는 그를 앞만 보고 달려가게 만들었다. 죽기살기로 수십년 동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터로 달려간 덕에 현대건설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목표 달성이 중요할 뿐 과정상의 흠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고 넓은 땅을 샀으며 잘나가는 정치인이 됐지만, 마침내 대선에 출마한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목표 달성 과정에서 소홀히 했던 과정상의 흠결, 자기관리 미비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1_ 젊은 날의 박정희 전 대통령 부부와 세 자녀.<br>2_ 1975년 10월9일 어린이회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근혜.<br>3_ 1977년 2월12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해외주재 공관장 내외들을 접견하는 박근혜.
이 후보의 잠재의식 속에 어머니 콤플렉스와 함께 자리잡은 것은 형제 콤플렉스다. 심리학자 카디너(Kardiner)는 어린 시절 형제관계에서 취하는 태도가 훗날 지도자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 이 후보의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은 7남매 중 둘째 형 상득 씨였다. 당시 상득 씨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과 동네에서 소문난 수재로,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경남 포항 달동네 집을 팔고 서울 이태원 판자촌 골방으로 이사한 것도 서울대에 입학한 상득 씨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다. 형들의 옷을 물려 입고 형 때문에 고교 진학을 포기할 뻔했던 ‘아픈 기억’이 이 후보 자신도 모르게 깊이 남아 있었고, 이것이 강한 상승 욕구로 연결됐으리라 본다.
1992년 5월29일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악수하는 이명박(오른쪽). 1978년 4월5일 서울대 교수회관 옥상에서 관악캠퍼스를 둘러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5·16군사정변 이후 군정 3년, 3·4공화국 18년 등 모두 21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한 박 전 대통령이 딸 박근혜에게 끼친 영향은 태양과도 같았다. 절대 권력자였고 지금도 많은 국민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버지로 인해 견고하게 구축된 것은 ‘박정희 제일주의’다. 박 후보에게 ‘아버지 박정희=스승=국가지도자=애국=절대선’이기 때문에 어떤 내외부의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박 후보가 5·16은 구국 혁명이며, 유신정권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그의 아버지 콤플렉스는 박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하는 ‘아버지 동일시’ 현상으로 연결된 듯하다.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가 최측근에게 피살됨으로써 박 후보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신중함과 배신자 응징심리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박 후보가 아버지를 닮은 또 다른 점은 바로 완벽주의다. 아버지는 군인 시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칼 같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유명했는데, 박 후보도 언론 인터뷰 2~3시간 동안 자세를 흩뜨리지 않을 만큼 절제된 언행을 유지한다.
박 후보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아버지 콤플렉스의 양면성이다.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 향수’ ‘박정희 후광’ ‘박정희 신드롬’ 같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지만, 언제 어떻게 ‘박정희 역풍’을 불러올지 모른다.
박 후보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업보로 독신 콤플렉스도 있다. 박 후보는 “결혼하고 싶었지만 운명이 그렇지 못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박 후보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여성 지도자에게는 공적 활동은 물론 사생활에서도 한 치의 의혹이 없어야 한다. 박 후보가 의혹투성이인 고(故) 최태민 목사를 고집스러울 정도로 옹호하는 것도 독신 콤플렉스와 결벽주의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 후보와 박 후보는 8월19일 운명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단점을 최소화하고 장점을 극대화해 경선, 나아가 본선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보다 ‘콤플렉스 극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