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7

..

‘조작 스캔들’ BBC의 굴욕

여왕 다큐·퀴즈 프로그램 거짓 연출 잇단 들통, 사장이 뉴스에 출연 공개사과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7-08-01 14: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조작 스캔들’ BBC의 굴욕

    영국 런던의 BBC 본사.

    “시청자를 속일 것인지, 아니면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하라면 프로그램을 포기하겠습니다.”

    7월20일 영국 공영방송 BBC 뉴스 스튜디오에는 아주 특별한 출연자가 나와 메인 앵커 존 소펠이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 공세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날 출연자는 다름 아닌 BBC 최고경영자 마크 톰슨.

    사장이 직접 자사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과해야 할 정도로 BBC가 다급한 처지에 놓인 것은 바로 얼마 전 터진 ‘여왕 다큐멘터리 조작 사건’ 때문이다. 독립 프로덕션 RDF가 올 가을 BBC를 통해 방영할 목적으로 제작한 ‘여왕과 함께한 1년’이라는 프로그램의 예고편에서 저지른 편집 실수가 화근이었다.

    이 예고편에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왕관을 벗어달라”는 사진작가의 요구에 기분이 상해 나머지 일정을 취소한 채 자리를 떠버린 것으로 묘사됐다. 이에 왕실 측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BBC는 편집 실수를 인정해 왕실과 시청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이 여왕 다큐 파문은 BBC에게 ‘시청자 기만 방송’이라는 오점을 남긴 최근 사태의 서막에 불과하다. 며칠 뒤 이번에는 시청자 전화 참여 프로그램에서 또 다른 문제가 터져나왔다. BBC가 해마다 개최하는 불우어린이 돕기 자선 프로그램 ‘어린이에게 희망을 (Children in Need)’ 등 6개 프로그램에서 ‘거짓 연출’을 한 사례가 한꺼번에 공개된 것이다.



    BBC의 공공성을 상징해온 이들 자선 프로그램 제작진은 시청자 전화가 걸려오지 않거나 퀴즈 프로그램에서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다른 제작 관계자를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마치 시청자인 양 속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시청자와 여론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톰슨 사장이 직접 자사 뉴스에 출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잇따라 터진 ‘거짓 연출’ 사건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버린 시청자들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경영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동안 쌓아온 공영방송 신뢰 ‘와르르’

    톰슨 사장은 물의를 빚은 이들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하는 한편, 6500명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제작규정과 방송윤리 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여왕 다큐를 제작한 RDF와는 당분간 프로그램 공급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도 발표했다. BBC의 이번 결정으로 RDF는 주가가 하루 만에 10% 이상 곤두박질치는 등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문제는 BBC 경영진이 밝힌 단기 처방만으로 땅에 떨어진 공영방송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프로그램 조작 스캔들은 대부분 공영방송 제작진의 자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거나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는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단순히 법규와 제도 보완만으로 해결하기보다, 무너져버린 일선 제작 현장의 규율을 어떻게 세울지에 BBC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BBC의 신뢰 회복 방안에 대해서도 백가쟁명식 해법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전체 제작 물량의 30~40%를 외주 제작에 의존하는 현재의 프로그램 공급 방식이 이번 사태를 야기했다고 지적한다. 또 혹자는 BBC가 요리와 퀴즈쇼는 물론, 시시콜콜한 주부 대상 드라마 등 안 해도 될 프로그램들까지 지나치게 많이 다루는 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한마디로 이번 조작 스캔들이 일부 제작진의 우발적 실수가 아니라, 총체적인 ‘시스템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란 뜻이다.

    ‘조작 스캔들’ BBC의 굴욕

    조작 스캔들로 물의를 일으킨 BBC의 다큐멘터리‘여왕과 함께한 1년’의 예고편 장면. 왕관을 벗어달라는 사진작가의 요구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우발적 실수 아닌 총체적 시스템 탓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시청자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일선 제작진의 ‘한건주의’를 지적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BBC 이사회 의장을 지낸 마이클 그레이드 ITV 사장은 “이번 파문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젊은 PD들이 판치는 독립 프로덕션과 이들을 우대해온 공영방송의 정책 실패가 빚어낸 사건”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대중지 ‘더 선’의 편집장을 지낸 켈빈 매킨지는 “서른 살이 안 된 PD들을 BBC에서 내몰고, 다른 직업 경험이 없는 ‘초짜PD’들은 아예 제작 현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또한 “PD들이 사장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며 경험 많은 중견 인력을 홀대하는 방송계 풍토를 꼬집었다.

    물론 일부 제작진의 과거 실수를 지나치게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특히 좌파 성향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영국 언론의 ‘BBC 때리기’가 도를 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이라크전 문제로 BBC와 갈등을 빚은 영국 정부가 BBC를 ‘왕따’시키려 하는 마당에 경쟁사들의 반(反) BBC 정서까지 겹쳐 이번 사태의 파장이 필요 이상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논란이 있다 해도, 눈속임으로 시청자를 우롱한 이번 조작 스캔들이 그동안 BBC가 자랑해온 ‘시청자 신뢰’라는 명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만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신뢰받는 공영방송의 교과서’로 꼽혀온 BBC 제작진이 정작 방송학 교과서를 펴놓고 ‘시청자에게 신뢰받는 법’에 관한 강의를 듣는 ‘굴욕’을 연출하게 된 셈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