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의 시작이 그렇듯 전시 ‘가지 않은 길 _ 그림, 문학을 그리다’도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직업이 큐레이터인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많은 화가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독서광이었다. 청소년 시절 그들은 문학소년, 문학소녀였다. 또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글을 쓰는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림세계에 살고 있는 내게 이구동성으로 “여건만 됐으면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화가와 작가는 서로에게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동안 우리 문학동네와 그림동네는 데면데면하고 서먹한 사이였다. 시·서·화를 하나로 보던 우리 전통을 들추지 않더라도 불과 20, 30년 전만 해도 이중섭 김환기 천경자 같은 유명화가의 친한 친구들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는 뭔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집단의 ‘순수’를 최고 덕목으로 강조한 현대미술의 강령에 의해 그리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명확지는 않지만 아무튼 ‘문학을 그림으로 만나는 일’은 오래전 잃어버린 문학과 그림 사이의 친분을 회복하고 미술과 대중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도됐다.
문인·화가 75명 하나로 엮은 중차대한 ‘문화적 사건’
‘가지 않은 길 _ 그림, 문학을 그리다’전은 우리 문단의 전통 있는 문학상(대산, 미당, 황순원 문학상) 역대 수상작 중 33편을 선정해 그 작품세계와 호흡이 맞는 우리 화단의 역량 있는 화가를 섭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가 평소 좋아하는 한국 현대문학 작품을 선정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전시는 준비기간만 2년 가까이 걸렸다. 걸림돌도 많았다. 문학작품의 ‘저작권’ 문제는 전시를 앞두고 예상치 못한 난제로 등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에 임박해 도록이 나왔다. 어떤 분은 ‘미친 짓’이라 했고, 언론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문인과 화가 75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 중차대한 ‘문화적 사건’을 그동안 쭉 있어왔던 그저 그런 시화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시는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오는 것으로 완성되고, 비로소 거기서부터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되는 법이다.
전시는 2006년 11월23일 북촌미술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문화일보 갤러리, 평택문화예술회관, 거제문화예술회관, 김해문화의전당을 거쳐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뒤를 이어 전시 중이다. 7월20일부터 8월31일까지는 평촌 알바로시자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처음엔 겨울에만 전시하려고 했던 것이 관람객의 호응이 커 9개월간 장기 전시를 하게 된 셈이다.
요즘 큐레이터들의 화두는 학구적이고 멋진 ‘예술의 순수’가 아니라 ‘대중’이다. ‘그들이 보고 싶은 그림은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방학이면 대형 전시장에 해외 유명미술관의 ‘짝퉁’ 명화전이나 외국 작가들의 세계 순회전에 관람객이 몰리는 것을 보며 분통을 터뜨리고 기가 죽었는데 이번 전시는 내게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
게다가 그림을 그려준 화가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주도 항공권 2장씩을 선물할 수 있는 돈도 마련했다. 원작자인 문인과 화가들 사이에 친분도 생겼다.
정호승-박항률 커플이나 이청준-김선두-김영남 트리오는 워낙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전시를 계기로 그분들 사이에 끼여 답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또 송기원 이인 선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화가 고찬규와 우선덕 선생은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갖는 사이가 됐다. 함께 ‘여성’을 생각하는 김혜순 시인과 정정엽 윤석남 화가에게도 작은 의미가 있었고, 그 밖에도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올해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100년,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맞춰 올 여름엔 우리 아이들에게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동시전을 열어줄 생각이다. ‘소년’지가 발행된 11월1일에 맞춰 주옥같은 우리 현대시 100선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빗소리
시 _ 김지하·그림 _ 강승희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
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
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
死産된 채로 드러나
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
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침묵으로 나직히 共謀하듯
숨어 있다
빗소리는 그러나
침묵을 연다
숨어서
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
나의 침묵을 연다
‘화개’, 실천문학사
사람의 향기
글 _ 송기원·그림 _이수동
이런저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장터에서 어린아이의 걸음걸이로 삼십분 남짓 걸리는 외가를 틈만 났다 하면 뻔질나게 찾아다닌 것은 무엇보다도 열 명 가까운 외갓집 식구들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누님과 나 이렇게 달랑 세 식구가 살다가, 나와 나이가 위아래로 고만고만한 연년생의 외사촌 형제들과 어울려들면, 그 번잡함 자체가 나에게는 더 이상 천국이 따로 없었다. 외갓집 삽짝을 나서자마자 바로 나오는 냇물에 뛰어들어 풍덩풍덩 개헤엄을 치거나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고 쪽대로 물고기를 잡다 보면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더군다나 밤이 되어 고만고만한 일고여덟 명이 좁은 골방에서 득시글 뒹구는 기쁨이라니! - 중략
창작과비평사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글 _ 서정인·그림 _박항률
나와 역전에서 다리로 대운하를 건넜어요. 그날 행선지는 구원의 성 마리아 대가람이었어요. 골목들은 비좁고 실핏줄 같은 운하들은 사방으로 뻗었는데, 곤돌라는 간 데 없고 동력선이 짐들을 실어 날랐어요. 곤돌라는 대운하 덮인 다리께에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었어요. - 중략
거긴 아마 베네치아의 중심이었어요.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자지요. 딴은 그 마르코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거기서 밥도 나오고, 옷도 나오고, 집도 나오겠지요. 그 사원도 보수를 하느라 한쪽 면을 온통 강관들로 얽어놨어요. 그 비계 앞이었어요. 바로 내 눈앞에서 한 일본 중년 부인의 허리춤 전대 속으로 한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가 있어요. 그놈이었어요. - 중략
작가정신
얼음비단, 얼음아씨
글 _ 김혜순·그림 _ 윤석남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아주 아주 멀고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안았어요.
한 번도 녹아본 적 없는 머나먼 눈나라
그 나라의 얼음 아씨들이
눈을 먹고사는 누에가 짠 氷蠶에서 실을 뽑아선
시리디시린 얼은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선
내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어요.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에서 가로수들 녹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차디찬 바람이 내 손톱들을
저 멀고 먼 나라로 몰아가버렸어요.
나는 그만 오갈 데 없어진 사막의 물새알처럼
신호등 앞에 둥그런 눈사람으로 서 있었어요.
천사란 가슴속에, 온몸 속에
핏줄마다 살결처럼 스며드는 것
효모처럼 내 몸속에서 부푸는 눈보라
얼음 아씨들 내 몸속에서
솜털처럼 휘날렸어요.
그 가볍고도 환한 눈물이 이불처럼
내 속을 그만 안아버렸어요.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꽃은 훈장
시 _ 천상병·그림 _박방영
꽃은 훈장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훈장이다.
산야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사람은 때로 꽃을 따서 가슴에 단다.
훈장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의젓한 일인가.
인류에게 이런 은총을 내린 하느님은
두고두고 축복되어 마땅한 일이다.
전진을 거듭하는 인류의 슬기여.
‘귀천’, 답게
미시령 큰바람
-그날 미시령은 바람 그거 이익섭 형에게
시 _ 황동규·그림 _이종구
1
아 바람!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설악산이 흔들리고
내 등뼈가 흔들리고
나는 나를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2
초연히 살려 할 적마다
바람에 휩쓸린다.
가차없이
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나기도.
길동무 되어주는 건 흠집투성이의 가로수와
늘 그런 술집 간판뿐.
(내 들르는 술집은 옮겨다니며 줄어든다.
아예 간판을 뗀 곳도.)
점점 바람이 약해진다.
3
이젠 바람도 꿈속에서만 분다.
아니다, 꿈 바깥에서만 불다 간다.
나 몰래 술집 간판을 넘어트리고
가로수를 부러트리고
꿈의 생가(生家)를 무너트리고
바람은 꿈 없이 잠든다.
4
바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작은 새 하나를 꿈꾼다.
바람이 품에 넣다 잊어버린 새
날다가 어느 순간 사라질
고개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벌써 보이지 않는
그런 얼굴 하나를.
- 중략
‘미시령 큰바람’ 문학과지성사
언니의 폐경
글 _ 김훈·그림 _최혜광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여름 속옷에도 붙어 있었고 겨울 속옷에도 붙어 있었다. 여름의 머리카락과 겨울의 머리카락이 같은 모질(毛質)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고,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여름의 머리카락은 스트레이트 파마였는데 겨울의 머리카락은 웨이브로 곱슬거렸다.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젊고 건강한 여자의 나신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환영 속의 여자는 이름을 가진 어떤 여자라기보다는 여자라는 종족의 먼 조상이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익명의 여자들이 다 합쳐진, 여자의 군집체처럼 느껴졌다.화석 속의 여자가 세상으로 뛰쳐나와 내 앞에서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환영은 이내 지워졌다. 환영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고 휑하니 빠져나간 세월의 빈자리가 허허로웠다. 머리카락 두 올을 테이프로 찍어서 쓰레기통에 버릴 때 목덜미에 오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강산무진’, 문학동네
직업이 큐레이터인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많은 화가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독서광이었다. 청소년 시절 그들은 문학소년, 문학소녀였다. 또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글을 쓰는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림세계에 살고 있는 내게 이구동성으로 “여건만 됐으면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화가와 작가는 서로에게 ‘가지 않은 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동안 우리 문학동네와 그림동네는 데면데면하고 서먹한 사이였다. 시·서·화를 하나로 보던 우리 전통을 들추지 않더라도 불과 20, 30년 전만 해도 이중섭 김환기 천경자 같은 유명화가의 친한 친구들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는 뭔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집단의 ‘순수’를 최고 덕목으로 강조한 현대미술의 강령에 의해 그리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명확지는 않지만 아무튼 ‘문학을 그림으로 만나는 일’은 오래전 잃어버린 문학과 그림 사이의 친분을 회복하고 미술과 대중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시도됐다.
문인·화가 75명 하나로 엮은 중차대한 ‘문화적 사건’
‘가지 않은 길 _ 그림, 문학을 그리다’전은 우리 문단의 전통 있는 문학상(대산, 미당, 황순원 문학상) 역대 수상작 중 33편을 선정해 그 작품세계와 호흡이 맞는 우리 화단의 역량 있는 화가를 섭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가 평소 좋아하는 한국 현대문학 작품을 선정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 전시는 준비기간만 2년 가까이 걸렸다. 걸림돌도 많았다. 문학작품의 ‘저작권’ 문제는 전시를 앞두고 예상치 못한 난제로 등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에 임박해 도록이 나왔다. 어떤 분은 ‘미친 짓’이라 했고, 언론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문인과 화가 75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 중차대한 ‘문화적 사건’을 그동안 쭉 있어왔던 그저 그런 시화전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시는 관람객이 전시장에 들어오는 것으로 완성되고, 비로소 거기서부터 또 다른 사건이 시작되는 법이다.
전시는 2006년 11월23일 북촌미술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문화일보 갤러리, 평택문화예술회관, 거제문화예술회관, 김해문화의전당을 거쳐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뒤를 이어 전시 중이다. 7월20일부터 8월31일까지는 평촌 알바로시자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처음엔 겨울에만 전시하려고 했던 것이 관람객의 호응이 커 9개월간 장기 전시를 하게 된 셈이다.
요즘 큐레이터들의 화두는 학구적이고 멋진 ‘예술의 순수’가 아니라 ‘대중’이다. ‘그들이 보고 싶은 그림은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방학이면 대형 전시장에 해외 유명미술관의 ‘짝퉁’ 명화전이나 외국 작가들의 세계 순회전에 관람객이 몰리는 것을 보며 분통을 터뜨리고 기가 죽었는데 이번 전시는 내게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
게다가 그림을 그려준 화가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주도 항공권 2장씩을 선물할 수 있는 돈도 마련했다. 원작자인 문인과 화가들 사이에 친분도 생겼다.
정호승-박항률 커플이나 이청준-김선두-김영남 트리오는 워낙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전시를 계기로 그분들 사이에 끼여 답사를 다녀올 수 있었다. 또 송기원 이인 선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던 화가 고찬규와 우선덕 선생은 전시장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갖는 사이가 됐다. 함께 ‘여성’을 생각하는 김혜순 시인과 정정엽 윤석남 화가에게도 작은 의미가 있었고, 그 밖에도 전시에 참여한 화가들은 문학적 상상력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올해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100년, 한국 현대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맞춰 올 여름엔 우리 아이들에게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동시전을 열어줄 생각이다. ‘소년’지가 발행된 11월1일에 맞춰 주옥같은 우리 현대시 100선을 그림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빗소리
시 _ 김지하·그림 _ 강승희
빗소리 속엔
침묵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무수한 밤 우주의 침묵이
푸른 별들의 가슴 저리는 침묵이
나의 운명이 숨어 있다
빗소리 속엔
미래의 리듬이
死産된 채로 드러나
잿빛 하늘에 흔적을 남기던
옛사랑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침묵으로 나직히 共謀하듯
숨어 있다
빗소리는 그러나
침묵을 연다
숨어서
숨은 내게 침묵으로 연다
나의 침묵을 연다
‘화개’, 실천문학사
사람의 향기
글 _ 송기원·그림 _이수동
이런저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장터에서 어린아이의 걸음걸이로 삼십분 남짓 걸리는 외가를 틈만 났다 하면 뻔질나게 찾아다닌 것은 무엇보다도 열 명 가까운 외갓집 식구들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누님과 나 이렇게 달랑 세 식구가 살다가, 나와 나이가 위아래로 고만고만한 연년생의 외사촌 형제들과 어울려들면, 그 번잡함 자체가 나에게는 더 이상 천국이 따로 없었다. 외갓집 삽짝을 나서자마자 바로 나오는 냇물에 뛰어들어 풍덩풍덩 개헤엄을 치거나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고 쪽대로 물고기를 잡다 보면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더군다나 밤이 되어 고만고만한 일고여덟 명이 좁은 골방에서 득시글 뒹구는 기쁨이라니! - 중략
창작과비평사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글 _ 서정인·그림 _박항률
나와 역전에서 다리로 대운하를 건넜어요. 그날 행선지는 구원의 성 마리아 대가람이었어요. 골목들은 비좁고 실핏줄 같은 운하들은 사방으로 뻗었는데, 곤돌라는 간 데 없고 동력선이 짐들을 실어 날랐어요. 곤돌라는 대운하 덮인 다리께에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하느라고 정신들이 없었어요. - 중략
거긴 아마 베네치아의 중심이었어요.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자지요. 딴은 그 마르코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거기서 밥도 나오고, 옷도 나오고, 집도 나오겠지요. 그 사원도 보수를 하느라 한쪽 면을 온통 강관들로 얽어놨어요. 그 비계 앞이었어요. 바로 내 눈앞에서 한 일본 중년 부인의 허리춤 전대 속으로 한 남자의 손가락이 들어가 있어요. 그놈이었어요. - 중략
작가정신
얼음비단, 얼음아씨
글 _ 김혜순·그림 _ 윤석남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는데
아주 아주 멀고 먼 곳에서 누군가 나를 안았어요.
한 번도 녹아본 적 없는 머나먼 눈나라
그 나라의 얼음 아씨들이
눈을 먹고사는 누에가 짠 氷蠶에서 실을 뽑아선
시리디시린 얼은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선
내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어요.
아주 아주 더운 여름날
땡볕 속에서 가로수들 녹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차디찬 바람이 내 손톱들을
저 멀고 먼 나라로 몰아가버렸어요.
나는 그만 오갈 데 없어진 사막의 물새알처럼
신호등 앞에 둥그런 눈사람으로 서 있었어요.
천사란 가슴속에, 온몸 속에
핏줄마다 살결처럼 스며드는 것
효모처럼 내 몸속에서 부푸는 눈보라
얼음 아씨들 내 몸속에서
솜털처럼 휘날렸어요.
그 가볍고도 환한 눈물이 이불처럼
내 속을 그만 안아버렸어요.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꽃은 훈장
시 _ 천상병·그림 _박방영
꽃은 훈장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훈장이다.
산야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사람은 때로 꽃을 따서 가슴에 단다.
훈장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의젓한 일인가.
인류에게 이런 은총을 내린 하느님은
두고두고 축복되어 마땅한 일이다.
전진을 거듭하는 인류의 슬기여.
‘귀천’, 답게
미시령 큰바람
-그날 미시령은 바람 그거 이익섭 형에게
시 _ 황동규·그림 _이종구
1
아 바람!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설악산이 흔들리고
내 등뼈가 흔들리고
나는 나를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2
초연히 살려 할 적마다
바람에 휩쓸린다.
가차없이
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나기도.
길동무 되어주는 건 흠집투성이의 가로수와
늘 그런 술집 간판뿐.
(내 들르는 술집은 옮겨다니며 줄어든다.
아예 간판을 뗀 곳도.)
점점 바람이 약해진다.
3
이젠 바람도 꿈속에서만 분다.
아니다, 꿈 바깥에서만 불다 간다.
나 몰래 술집 간판을 넘어트리고
가로수를 부러트리고
꿈의 생가(生家)를 무너트리고
바람은 꿈 없이 잠든다.
4
바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작은 새 하나를 꿈꾼다.
바람이 품에 넣다 잊어버린 새
날다가 어느 순간 사라질
고개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벌써 보이지 않는
그런 얼굴 하나를.
- 중략
‘미시령 큰바람’ 문학과지성사
언니의 폐경
글 _ 김훈·그림 _최혜광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의 속옷에 가끔씩 여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여름 속옷에도 붙어 있었고 겨울 속옷에도 붙어 있었다. 여름의 머리카락과 겨울의 머리카락이 같은 모질(毛質)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염색기가 없는 통통하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아 보였고, 끄트머리까지 힘이 들어 있었다. 여름의 머리카락은 스트레이트 파마였는데 겨울의 머리카락은 웨이브로 곱슬거렸다. 겨울 속옷의 섬유 올 틈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어내자 더운 방바닥 위에서 머리카락은 탄력을 받고 꿈틀거렸다. 젊고 건강한 여자의 나신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환영 속의 여자는 이름을 가진 어떤 여자라기보다는 여자라는 종족의 먼 조상이거나,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익명의 여자들이 다 합쳐진, 여자의 군집체처럼 느껴졌다.화석 속의 여자가 세상으로 뛰쳐나와 내 앞에서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환영은 이내 지워졌다. 환영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고 휑하니 빠져나간 세월의 빈자리가 허허로웠다. 머리카락 두 올을 테이프로 찍어서 쓰레기통에 버릴 때 목덜미에 오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강산무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