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DJ 사저. 최근 정치인들의 발길이 잦다.
“내가 한반도 평화·번영 정책의 씨앗을 뿌렸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가꾸고 있다. 한 번 더 대통령을 만들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여기에 동교동 가신 출신인 설훈 전 의원은 평화세력의 재집권론으로 ‘김심(金心)’을 포장한다.
“DJ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조를 이어갈 세력과 인물이 집권하길 바라는 것 같다.”
사실상 같은 말이다. 햇볕정책을 내동댕이칠 가능성이 있는 한나라당보다 범여권 세력의 집권을 원한다는 뜻이다. 이는 정치권이 익히 예상했던 DJ의 속내이자 시나리오다. 충격은 생각보다 적다. 불가사의한 것은 ‘DJ의 괴력’이다. 건강이 좋지 않고 무엇보다 ‘전직’인 그가 통합파와 범여권의 대선 예비주자들을 전부 동교동으로 불러모았다. 이 파워의 배경은 무엇일까.
3월 초,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제3의 길’을 모색코자 탈당을 추진했을 때의 일이다. 대사를 앞둔 몇몇 인사들이 동교동을 찾았다. 말 그대로 ‘훈수’를 듣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들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DJ가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DJ는 동문서답하듯 “통합하라”는 평소 지론만 던졌다. 탈당파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화두였다.
DJ에 대한 기대감을 접고 여의도로 돌아온 통합론자들은 허허벌판에 섰다. 생존을 위해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만나 영입을 타진했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격과 실리를 따졌다. 입으로는 통합을 얘기했지만, 행동은 둔했다. 외로움(조직)과 배고픔(창당자금)에 시달리던 통합론자의 ‘리더’로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레이스를 포기한 고건 전 총리를 만나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구심점이 없는 통합론자들에게 좀처럼 힘이 실리지 않았다.
대선 예비주자들도 ‘춥고 배고픔’은 현실이었다. 여권의 분열상을 극복할 만한 리더십과 희생정신을 찾기 어려웠다. DJ는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창당파와 대선 예비주자들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메시지를 보냈지만 힘은 실어주지 않는 ‘이중적’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통합파, 창당 어려움 인식 후 DJ에 SOS
좌고우면하던 통합론자들은 4월부터 돈, 조직, 지역 기반도 없는 창당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피부로 느꼈다. “창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다. 결론은 역시 ‘DJ’였다. 동교동이라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번졌다. DJ의 과거가 이를 증명했다. 탈당파 한 인사는 “동교동과 DJ가 대통령을 배출하는 최고 사관학교이자 교관임을 인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DJ의 위상을 새롭게 인식한 진영은 또 있다.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현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지낸 문희상 유인태 의원 등이다. 우리당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이들도 DJ를 의식하면서 그가 내건 대통합의 명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마이웨이’를 노래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5월18일과 19일, 광주를 방문한 노 대통령은 결국 타협의 손을 내밀었다.
동교동 DJ 사저를 방문한 정치인들. 손학규 전 경기지사,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위부터).
기간당원제가 정치개혁의 전부라던 노 대통령이었다. 정치개혁 근본주의자였던 그는 DJ의 대공세 앞에 ‘대세’를 수용하는 극단적 실용주의로 돌아섰다. 이것으로 정국 주도권은 DJ에게로 넘어갔으며, DJ는 노 대통령과 함께 범여권 최고의 킹 메이커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서 의문이 뒤따른다. DJ는 과연 신당 창당에 필요한 필요충분조건, 즉 조직·자금· 세력을 충당할 수 있을까. 혹시 허기진 통합론자들이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범여권 인사들과 대선주자들은 DJ의 능력을 믿는다. DJ 측은 몇몇 정치 이벤트를 통해 이런 냄새를 은연중 풍겼다. 4월25일, DJ의 아들 홍업 씨가 목포 재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당초 동교동은 홍업 씨의 출마에 반대했다. 이희호 여사까지 말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DJ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동교동 한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의문이 풀린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홍업 씨의 출마는 정치권에 대한 DJ의 무력시위”라는 것이다.
“DJ도 노욕(老慾)이라는 비난 여론에 대해 잘 안다. 그러나 그 선거를 통해 DJ는 호남의 영향력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DJ의 의중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선거 후 우리당 탈당에 소극적이던 호남 출신 정치인들이 대통합의 대열에 적극 나선 것. 대선 예비주자들도 동교동과의 거리를 좁혔다.
DJ가 선거를 치를 만한 자금을 쥐고 있을지도 관심사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을 떠도는 소문 하나. 5월 중순 7일간 DJ가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이 제정한 제1회 ‘자유상’을 수상하기 위해 나들이를 다녀온 직후, 유럽의 한인사회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가 한나라당 모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노벨상까지 받은 그가 10시간씩이나 비행기를 타고 독일을 찾은 것을 어떻게 보는가. 베를린 한인사회에서는 DJ의 독일 방문을 스위스은행과 결부해 말한다.”
한나라당은 5월 말 현재 이 첩보의 진위 여부를 놓고 다각도로 분석 중이다. 물론 이 첩보는 야당은 물론 범여권의 대선 예비주자 진영에 시나브로 퍼졌다. 일부 인사는 ‘동교동에 뭔가 있긴 있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어느 때보다 강한 정치적 파워를 확보한 DJ는 한나라당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동교동으로 불러모은 모든 정치인들에게 던진 화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으라”는 정치적 의지다. 국가 원로 자리까지 외면하면서 DJ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햇볕정책이다. 햇볕정책은 DJ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DJ는 지금도 참여정부가 대북송금과 관련해 특검을 진행한 일에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다. 동교동 한 관계자의 지적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개혁정권 10년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리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햇볕정책의 고사 가능성이다.”
동교동의 안전 문제도 중요하다.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DJ의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설이 흘러다녔다. 정권이 야당에 넘어가면 이 의혹은 본격적으로 도마에 오르고, 경우에 따라 동교동이 포성에 휩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DJ의 정책이 총체적으로 역사의 재평가를 받아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DJ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체제의 조기졸업을 업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정부 시절 해외로 매각된 금융기관, 공기업, 주요 기업 등에 대해 국부 유출이라는 지적이 고개를 든 지 오래다. 경영권 매각 과정을 둘러싼 특혜 의혹도 심심찮게 터져나온다.
DJ를 찾은 범여권 지도부 인사들. 박상천 민주당 대표, 한명숙 전 총리, 김한길 중도신당 대표(위부터).
2007년 6월 동교동은 대선뿐 아니라 내년 총선까지 염두에 둔 ‘포석’에 나서야 한다. 대선에서 지더라도 총선에서 안전판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영향력을 강화해야 대선에 패하더라도 총선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DJ는 요즘 ‘정치’를 꼼꼼히 챙긴다고 한다. DJ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은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다. 그는 민주당은 물론 우리당, 심지어 한나라당 인사들까지 두루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옥살이를 하다 나온 권노갑 전 고문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강철 정무특보와 골프를 치는가 하면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식사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DJ는 대선으로 가는 모든 길을 ‘동교동’으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분위기라면 통합 신당도, 대선 후보도 DJ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 어렵다. DJ 중심의 구도짜기에 성공한 동교동은 곧바로 ‘정치위크’를 폐쇄했다. 호흡 고르기에 들어간 동교동은 여유로운 분위기다.
그러나 갈 길은 험난하다. 노선이 다른 정치세력이 한 후보 아래서 살을 맞대고 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다. 지금은 세가 불리해 허리를 굽혔지만, 30% 전후의 지지율이 40%나 그 이상으로 오르면 정치적 상상력이 풍부한 노 대통령은 자기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정치 지향점이 다르다. DJ는 남북문제를 포함한 임기 중 치적을 보존하기 위해 정권재창출에 목을 맨다. 반면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를 극복한 대통령으로 남고 싶은 생각이 크다. 설사 대선에서 지더라도 자기 노선을 따르는 미니정당이라도 가지면 족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현직과 전직의 동행은 오월동주(吳越同舟) 모양새다. 한편 민주당 박상천 대표는 대통합을 주장하는 DJ에게 불가한 이유를 조목조목 따졌다. DJ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안방 반란이다.
DJ의 부활을 바라보는 여론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다. DJ의 외출은 무능한 범여권과 그에 못지않은 한나라당의 역부재에서 비롯된 바 크다. 그래서 DJ의 외출을 노추(老醜)라고 질타하는 여야, 특히 야당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DJ를 공격하는 한나라당의 공세는 무능을 드러내는 커밍아웃처럼 들린다. 동교동을 찾는 대선 예비주자들의 발걸음이 당분간 끊이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