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실용적인 사고를 하는 07학번. 이들이 40세가 되어 사회를 주도하게 될 2027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주간동아’는 유엔미래포럼 박영숙 대표와 KT 경영연구소 미래사회센터의 연구자료, 이종호 박사의 저서 ‘2030년 미래한국에서는 어떤 일이?’(김영사), 서울대 서이종 교수(사회학과)의 조언을 토대로 2027년 어느 날 07학번의 동창회 풍경을 가상 시나리오로 꾸며봤다. - 편집자 -
2027년 봄기운이 완연한 5월 어느 날. 집단 네트워크 서비스 사이트 ‘쭛쭛스페이스’에 근무하는 이윤호는 ‘P대 영문과 07학번 동창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다. 그의 ‘애마’는 목적지까지 알아서 가는 지능형 자동차. 한때 ‘속도광’이었던 그는 직접 운전을 하던 과거가 가끔씩 그립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도 마음 한구석이 왠지 편치 않다. 전국적으로 일반화된 유비쿼터스(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 때문에 화장실 갈 때조차도 업무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엔 DMB 휴대전화로 TV를 시청하고 전자책을 읽는 게 즐거웠지만, 이제는 첨단기술이 족쇄다.
‘2세대 컴퓨터를 쓰던 20년 전이 좋았어. 유비쿼터스 때문에 오히려 노동 강도만 높아졌잖아.’
동창회가 열리는 서울 광화문 H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6명의 친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업가 김범, 판사 이민호, 은퇴 컨설턴트 나혜미,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다니는 황찬성, 재취업을 꿈꾸며 학생 신분으로 되돌아간 염승현, 고급 음식점의 매니저로 일하는 강유미. 대학 시절 함께 조모임을 하고 토익 스터디도 했던 친구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지만 결혼식은 NO!
오늘 동창회를 주도한 사람은 요즘 ‘지붕광고(Rooftop Advertising) 시장’에 진출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김범이다. 10년 전만 해도 대학 친구들은 “건물 옥상에 광고판을 왜 붙이느냐”며 그의 사업 구상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포털사이트의 위성지도 검색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지붕광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붕광고 시장을 초기에 선점한 그는 업계 1위를 달리는 벤처기업 대표가 됐다. 요즘 그는 북한을 자주 오가며 평양의 광고문화까지 바꿔놓았다.
“김범, 반갑다! 돈도 많이 벌었는데 결혼 소식은 아직 없냐?”
이윤호가 인사를 건네자 김범은 씩 웃으며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지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은 없어”라고 대답한다. 가정이라는 형식에 얽매이고 아이를 키우는 데 에너지를 뺏기는 것이 싫다는 게 이유다.
실제로 이윤호의 07학번 동기 중 절반은 싱글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학업을 이어가고 직장도 수차례 옮기다 보니 결혼은 뒷전이 된 것. “로봇 섹스 파트너가 있어 굳이 결혼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친구가 있을 정도다. 이윤호는 3년 전 결혼했지만 아직 자녀는 없다.
“이봐, 두 사람! 당신들처럼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2세를 낳아야 우리 세대가 노년에 걱정 없이 살 것 아니야.”
나혜미가 둘의 대화에 끼어든다. 일곱 살짜리 아들과 세 살짜리 딸을 둔 나혜미는 ‘애국자’로 통한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요즘, 아이를 둘이나 낳는 부부는 흔치 않다.
나혜미가 애국자가 된 이유는 인구 변화의 위력을 누구보다 절감했기 때문이다. 20대 시절 강남의 잘나가는 학원강사였던 그는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초·중·고등학생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학원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바로 노년층의 은퇴 후 삶을 설계해주는 은퇴 컨설턴트다. 학원강사로 일할 때 온라인으로 평생교육원의 은퇴 컨설턴트 과정을 이수한 덕에 그는 ‘인생 2모작’을 쉽게 개척할 수 있었다.
요즘은 친구들끼리 모이면 ‘노후 대책’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노후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 ‘현재 노년세대를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는 20년 전인 2007년이나 지금 2027년이나 사십 줄에 접어든 세대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근로세대인 이들은 보험료 부담에 허리가 휠 지경이다. 더 큰 문제는 07학번이 연금생활자가 됐을 때 이들을 부양할 젊은 층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이러한 사회문제는 세대간 갈등으로까지 비화됐다.
2027년에는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환경이 구현된다.
“민호야, 얼른 정계에 진출해서 우리 세대에게 유리한 법 좀 만들어줘!”
김범의 진지한 권유에 이민호는 쓴웃음을 짓는다. “50~70대 정치인이 노인당까지 만들어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40세 정치인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2000년 전후에 ‘젊은 피’로 불리며 정치권에 대거 입성한 ‘386’ 정치인들이 2027년에도 여전히 정치판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된 데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07학번 세대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 하지만 이민호는 “완벽한 전자민주주의가 실현돼 민의가 한 번에 수렴되고 법을 만드는 인공지능 로봇이 출현하면 국회의원이란 직업도 곧 없어지지 않을까”라며 너스레를 떤다.
20대에 판사로 임용된 이민호는 동기들의 ‘호프’였다. 대학 시절 얼마나 많은 ‘고시 낭인’들이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법조인의 삶을 동경했던가. 하지만 2027년의 20대는 더 이상 판사를 선망하지 않는다. 모든 판례가 전산화, 통계화돼 있어 판사의 임무를 상당 부분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을 다 바쳐 공부한 것이 아쉽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는 조만간 국제변호사로 변신할 작정이다.
이민호의 말을 듣던 염승현도 “공부, 참 지겹다”고 거든다. 영어에 소질 있던 그는 2010년대 동시통역사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2018년 완벽한 동시통역이 가능한 컴퓨터가 출현하면서 밥그릇을 빼앗겼다. 이후 그는 인력공급업, 서비스업을 전전했지만 모두 적성에 맞지 않아 일을 그만둔 상태다. 요즘은 학생 신분으로 되돌아가 미국의 한 아이비리그 대학 경영학 석사과정을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있다. 금융 전문가로 새 출발 하는 것이 염승현의 목표다.
그런 두 사람의 처진 어깨를 툭 치며 격려하는 사람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다니는 황찬성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뭐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다 잘될 거야.”
대학 시절 힙합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춤을 UCC(사용자제작콘텐츠)로 제작하던 그는 끼를 살려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들어갔다. 애초 꿈꿨던 연예인은 되지 못했지만, 그는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2020년이 지나면서 종이신문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약화됐고, 지상파 방송국도 과거의 권력을 대부분 잃었다. 지금은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다. 황찬성은 취미로 음악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주말을 보낸다. 그는 자신만의 방송에서 가수도 PD도 DJ도 될 수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다고 말한다.
“자자, 다들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고급 음식점 매니저로 일하는 강유미가 친구들의 대화를 잠시 중단시켰다. 음식이 식어 맛이 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직업병’이 도졌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외식업체에 들어간 그는 몇 년에 한 번씩 유명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기며 요리와 서비스 노하우를 배웠다. 일반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은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로 일자리를 잃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문화시설과 레스토랑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숍들이 대거 문을 열면서 실력 있는 매니저의 몸값도 한껏 올랐다. 강유미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이 변해도 서비스업은 망하지 않는다”고 설파하며 다닌다.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윤호는 문득 놀라움을 느꼈다. 세월이 흘렀지만, 실리를 챙기고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던 친구들의 옛모습은 그다지 변한 게 없어서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외환위기로 부모세대의 실직 과정을 지켜봤고, 대학 시절 혹독한 취업난을 겪은 친구들은 특유의 ‘유연한 적응력’으로 무한경쟁 시대의 파고를 헤쳐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