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이 공개되자 국회에 불려간 강동순 방송위원(왼쪽)과 장동익 전 의사협회장.
“제가 연말정산 때문에 정형근 의원에게 1000만원 현찰로도 줬습니다. 그 사람은 정치헌금이 항상 풀로 차요. 2억5000만원 차요. 1000만원 주니까 전화 걸면은요, 예예, 회장님, 어느 단체라도 만나자, 이게 사람입니다.”(2007년 3월31일 강원 춘천시 베어스관광호텔에서 열린 강원도의사회 정기총회에서 장동익 당시 대한의사협회장의 발언)
“호남 사람들, 심하게 얘기하면 김정일이가 내려와도 우리 동네에는 포 안 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요. 이런 거는 누가 한반도를 통제해도 우리만 안 건드리면 된다. 이런 호남 사람들, 이게 문제라고 이게.”(2006년 11월9일 서울 여의도 일식집 ‘유메’에서 강동순 방송위원)
“내가 시키는 대로 도와줘, 깨끗하게. … 거짓말하고 법원에 가서도 거짓말하세요. 그게 실체에 맞아. … 희생타를 날려. 뭘 생각하겠다는 거야?”(2006년 9월22일 제이유사건을 수사하던 서울동부지검 백모 검사가 피의자 김모 씨에게)
이상은 최근 이슈가 된 녹취록발(發) 스캔들의 핵심 내용이다. 장동익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의사들끼리의 회의석상에서, 강동순 위원은 지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백 검사는 자기 사무실에서 거리낌 없이 한 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자기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세상에 유포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강원도의사회 정기총회에서는 모 참석자가 장 전 회장에게 “당신 발언을 모두 녹음했다”고 말했지만, 장 전 회장을 비롯한 다른 모든 참석자들은 ‘설마…’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는 후문이다.
잇단 ‘녹취록 스캔들’ 탐지업체 성업
누군가의 말을 몰래 녹음하는 것은 요즘 세상에선 아주 쉬운 일이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휴대전화 통화 내용을 전부 녹음할 수 있다. 시중에 출시된 소형 디지털 녹음기는 작동하기도 쉽다. 웬만한 사람은 다 가지고 다니는 MP3플레이어에도 녹음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돼 있다. 백 검사의 ‘거짓증언 강요 발언’을 녹음한 김씨는 평소 음악을 듣기 위해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MP3플레이어를 활용했다고 한다.
“애초에 녹음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자꾸 거짓증언을 강요하니까 주머니에 있는 MP3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눌러본 겁니다. 무려 9시간이나 녹음돼 있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빅 브라더(Big Brother)’ 시대에서 ‘넷 브라더(Net Brother)’ 시대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상대의 말을 녹음하고 유포할 수 있는 시대로의 전환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말뿐만 아니다. 얼마 전 박지윤 KBS 아나운서의 사생활 관련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된 일에서도 알 수 있듯, 요즘 세상에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정보도 얼마든지 새나갈 수 있다.
절대권력의 감시가 사라진 대신 개인에 의한 개인의 감시, 즉 상호 감시가 가능해졌다. 나를 감시하는 사람은 친구, 심지어 가족일 수도 있다. 사립탐정사무실을 운영하는 S씨에 따르면, 요즘 자기 자동차에 위치추적기와 녹음기가 몰래 설치돼 있는지를 탐지해달라며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장치를 설치하는 건 재개발사업을 따내려는 경쟁업체들이나 노조와 회사, 채권-채무 관계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부부나 애인 사이에서도 곧잘 설치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죠. 심지어 스토커가 몰래 여성의 자동차에 설치하기도 합니다.”
잇따른 녹취록 스캔들은 학습효과를 낳았다. 백 검사의 거짓진술 스캔들 이후, S씨의 사무실에는 조사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몰래 녹음하는지 여부를 탐지할 수 있는 장비에 대해 묻는 경찰과 검찰의 전화가 잦았다고 한다. 녹음 당사자인 김씨 또한 “녹취사건 이후 나를 조사하는 검찰이나 경찰의 조사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편가르기·패거리 문화 더욱 심화
‘한번 내뱉는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말을 주워 담지 못하는 것은 말한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술 발전 덕분에 ‘의도를 가진’ 듣는 사람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이다. 주워 담은 말이나 거둬들인 사생활 정보를 짧은 시간에 유포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공간과 시간의 고유성을 없애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적 공간이 언제든 공적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대중의 관음증과 미디어의 노출증이 결합했을 때 전파속도가 빨라진다”고 진단했다. 대표적인 예가 유명인사의 사생활에 관련된 사안들이다.
‘녹취 만능’ 신드롬은 우리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까.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사람처럼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에도,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말조심하는 또 하나의 ‘억압된 사회’가 도래하고 말 것인가. 이에 대해 중앙대 김재휘 교수(심리학과)는 “일본 사람들처럼 우리도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마음)를 분리해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느 민족보다 솔직한 한국인들도 이제는 공적 자신과 사적 자신을 가지고 다니면서, 바깥에서는 공적 자신으로만 움직이고 사적 자신은 끝까지 감출 겁니다. 용왕님께 간을 집에 두고 왔다고 거짓말하는 토끼처럼 말이죠.”
연세대 황정민 교수(심리학)는 “특히 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편가르기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적인 공간에서는 자기 생각을 솔직히 말하는 대신 두루뭉술하게 발언하고, 정말 믿을 만한 사람만 모인 ‘이너클럽’에서는 억눌렸던 것보다 더 과격한 언행을 보이리란 설명이다. 황 교수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패거리 문화, 끼리끼리 문화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는 우리 사회가 좀더 개방화, 민주화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그렇다면 상대가 내 말을 녹음하는지를 미리 알 수는 없을까? 탐지장치가 있긴 하지만 장치를 사람 몸 가까이에 갖다 대야 하기 때문에 현재 기술로는 상대 몰래 탐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말조심하는 게 최선책이라니, 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