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술실로 가기 위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탄 환자의 두 눈을 본 적이 있는가?
- 절박감과 간절함이 범벅 된, 윤기 없이 퀭한 눈빛. 기자의 경우가 그랬다. 지난해 11월 유방암 수술을 앞둔 어머니와 가졌던 수술실 문 앞에서의 짧은 무언의 눈맞춤. 이후 수술환자 가족 대기실에서의 6시간은 피를 말리는 듯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 몇 겹 유리문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을 일에 대한 형언키 어려운 갖가지 상상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른 수술환자의 가족들이라고 어찌 다른 심정이랴. ‘주간동아’는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의 협조를 얻어 암수술 현장을 참관했다.
- 122년 역사의 세브란스병원이 공중파 방송사의 의학다큐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언론매체의 취재를 위해 암수술 전 과정을 완전히 공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편집자 주>
기자에게 수술환자의 CT검사 소견을 말해주고 있는 김남규 교수.
수술환자 회복실 앞을 지나는데, 그곳에서 방금 나온 한 어린이 환자가 이동 침대에 실려 어디론가 향한다. 기분이 짠해진다. 꼬마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을까.
중앙수술실 ‘하얀 거탑’ 심장부
이날의 수술환자는 73세 남성 이모 씨. 대장암 환자다. 집도의는 세브란스병원 외과 김남규(52) 교수. 오전 8시에 시작된 또 다른 60대 남성 대장암 환자의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선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연세대 의대 출신의 외과 전문의로 1986년부터 20년 넘게 대장암 환자만 봐온 베테랑답다. 그가 집도하는 대장암 수술은 일주일 평균 10~15건.
B8 수술실. 기나긴 터널 같은 복도를 지나 다다른 곳. 환자는 이미 수술대 위에서 마취를 기다리고 있다. 고령인 데다 비쩍 말라 더욱 안쓰러워 보인다. 얼굴 가득 불안감이 서려 있다. 한껏 긴장한 눈치. 왜 안 그렇겠는가.
“대장암은 간과 폐로 잘 전이되는데 이 환자의 경우 일단 폐 전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S결장암인데, 종양의 사이즈도 작아서 병기(病期)는 2기쯤으로 추정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환자의 의무기록과 내시경 사진, 복부 CT(컴퓨터단층촬영) 결과 등을 면밀히 살펴본 김 교수의 설명이다.
수술환자는 입원 병동에서 수술실로 향하기 전에 마취전 처치실에서 일단 대기하게 된다. 소아 수술환자의 경우에는 보호자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곳에선 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한다. 혈압과 맥박, 체온, 산소포화도 등은 물론 금식 여부, 치아 상태, 병력 등도 꼼꼼히 체크한다. 또한 수술 후 찾아올 통증을 경감시키는 진통제를 주입하기 위한 관(管·일명 ‘무통주사’)을 환자에게 미리 삽입한다. 이러한 과정들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가끔 수술이 취소되기도 한다.
손과 팔을 깨끗이 소독하고 있는 집도의.수술가운 착용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는다(왼쪽부터).
“5분 이상 씻어야 해요. 보통 한 번 소독에 솔을 3개는 쓰죠. 젊은 의사들은 1분 정도 하고 마는 등 소독에 대한 개념이 약해요. 우리가 배울 땐 그러지 않았는데…. 수술 중엔 환자로부터의 감염에도 조심해야 하죠. 간염에 감염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거든요. 지금 수술할 환자도 C형 간염 보균자예요.”
소독을 마친 김 교수가 양팔을 가슴 위로 치켜든 채 수술실 문을 연다. 요즘 인기 절정인 MBC 메디컬 드라마 ‘하얀 거탑’의 수술장면에서 흔히 등장하는 그 자세 그대로다. 팔을 드는 이유는 소독한 손이 엉뚱한 물건 등에 닿아 오염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수술실 문을 여는 버튼은 발끝으로 조작한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1회용 수술가운을 입고 수술장갑까지 낀 김 교수가 수술대 옆으로 다가선다. 이번 수술에 참여할 인원은 집도의인 김 교수, 제1·2 조수인 전임의와 레지던트, 마취의 등 4명의 의사, 그리고 소독간호사(Scrub Nurse·수술도구 등을 맡으며 수술 진행에 참여)와 순환간호사(Circulating Nurse·수술 중 필요한 물품 등을 조달) 각 1명씩 총 6명이다. 수술실 간호사들의 일은 고되다. 그래서 이직률도 심한 편. 자연히 숙련된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70대 환자 최종 확인 “타임아웃 시행”
기자 외에도 참관인이 2명 더 있다. 의대생 1명과 간호실습생 1명이다. 바야흐로 수술 시작 직전이다.
“타임아웃(Time Out·‘일시 정지해 확인한다’는 의미)을 시행하겠습니다.”
분홍색 수술복을 입은 순환간호사가 환자의 이름, 수술 부위, 수술 방향, 예정된 수술 등을 차례로 말한 뒤 의사들과 소독간호사에게 “맞습니까?”라고 묻는다.
“맞습니다.”
수술 시작 전 마지막 점검은 필수다. 환자의 배를 열고 있는 모습. 의료진의 손놀림이 일사불란하다. 절제한 대장 조직에 불룩하게 솟아 있는 암덩어리(왼쪽부터).
11시25분. 수술이 시작됐다. 환자의 자세는 산부인과 수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로 누운 채 두 다리를 지지대에 얹은 상태. 수술 조명 아래 수술할 부위만 드러냈을 뿐, 다른 신체 부위는 모두 수술천으로 덮여 있다.
수술 중에 음악을 듣는 의사들이 적지 않다. 주로 클래식이거나 라디오 음악이다. 그래서인지 외과의사 중엔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꽤 있다. ‘하얀 거탑’의 주인공인 신임 외과과장 장준혁(김명민 분)은 수술실에서 전임 이주완(이정길 분) 과장이 틀었던 음악 대신 좀더 빠른 곡을 튼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四季)’ 중 ‘겨울.’ 수술 중 음악을 듣는 주된 이유는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음악 애호가임에도 절대 음악을 틀지 않는다. 돌발상황에 적절히 대비하려는 이유도 있고, 후진 교육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 그는 이를 “내 나름의 절제”라고 표현했다.
개복(開腹). 절개가 이뤄지고 보조기구를 수술대 옆에 고정시켜 수술 부위를 벌린다. 침묵, 이어지는 침묵. 바이털사인(Vital Sign)을 나타내는 기계, 각종 수술도구, 바퀴가 달린 이동식 수술용 발전기 등에서 나는 묵직한 소음들만 울릴 뿐이다. ‘하얀 거탑’에서와 달리 의사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머리를 맞대다시피 한 채 꼭 필요한 말만 나지막이 주고받는다. 하긴, 숙련된 의사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물론 김 교수도 수술 도중 큰 소리를 낼 때가 있다. 레지던트가 수술 중 졸거나 신참 소독간호사(흔히 ‘신졸(新卒)’이라고 불린다)가 지나치게 미숙할 때다. 분위기가 더 나쁠 땐 욕도 곧잘 한다. 오늘은 조용한 걸 보니 수술이 꽤 순조로운 모양이다. 환자가 비만하지 않으니 수술시간도 평소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 듯하다.
8개의 손은 일사불란하게 제각기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낸다. 드라마에서처럼 현란한 손놀림은 없다. 대신 안전을 위한 조심스럽고도 정확한 손놀림이 있다.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과 그의 라이벌인 노민국(차인표 분)이 함께 수술하면서 긴박감 넘치는 수술 솜씨를 겨룬 이른바 ‘수술 배틀(Battle)’은 수술 현장에선 있을 수 없는 가공의 설정이다. 수술 장면을 유리벽 너머에서 다른 의사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시설도 국내 병원엔 없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가끔씩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김남규 교수는 대장암 수술 분야의 전문가다.
줄곧 부동자세로 서 있던 간호실습생이 작은 키 탓에 수술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지 까치발을 한다. 문득 수술천 밖으로 나와 있는 환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평온하다. 천 한 겹 너머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사투 따위는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는 극명한 대비. 심상이 묘해진다.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고된 일, 우리끼리는 일용직 노동자”
세브란스병원엔 모두 4개 구역의 큰 수술실이 있다. 거의 모든 진료과의 수술이 이뤄지는 중앙수술실을 비롯, 심장혈관병원에는 심장 및 혈관 관련 수술을 하는 수술실이, 어린이병원에는 척추질환자와 분만을 위한 수술실이, 안이비인후과병원에는 당일 퇴원 환자들이 주를 이루는 안과 및 이비인후과 수술실이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중앙수술실엔 총 30개의 작은 수술실이 있다. 이 중 4개는 통원수술실로, 환자들이 단시간 내에 간단한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한 뒤 당일 귀가하는 전용 수술실이다. 30개의 수술실에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평균 126건의 수술이 이뤄진다. 토·일요일과 공휴일엔 응급환자의 수술이 진행된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맞은편 C3 수술실에선 성형외과 교수가 거대모반증 환자의 옆구리에 생긴 지방종과 거대모반증 부위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있다.
낮 12시. 김 교수가 기자를 부른다.
“가까이 와보세요. 이게 암입니다. 다행히 S결장막을 뚫진 않았군요. 장막을 침범했다면 병기는 2기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경우 림프절에 전이만 되지 않은 게 확인된다면 1기 암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저히 인체의 일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벌건 빛깔의 대장 조직 일부. 길이가 10cm를 넘을까 말까 한 이 절제 조직에 김 교수가 메스를 대고 세로로 절개한 뒤 뒤집자 암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름이 500원짜리 동전만한 불룩한 덩어리. ‘그래, 이놈이 사람을 죽게까지 하는구나. 못된 암 같으니라고.’
김 교수는 암조직에서 표본을 몇 차례 떼어냈다. 이 종양조직 표본들은 병리과로 넘겨져 현미경으로 정밀하게 관찰된다. 그리고 림프절 전이 여부 등을 살펴 항암화학요법 등 향후 환자에 대한 치료 강도를 결정하는 가늠자로 사용된다.
이제 남은 일은 수술용 자동 문합기로 절제 부위의 양 끝을 압착해 연결하고 열었던 배를 닫는 것. 마무리 작업인 셈이다. 전기소작기가 닿는 부위에선 다시 간헐적으로 흰 연기가 조금씩 피어오른다.
외과의사들은 첫 집도를 가리켜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을 쓴다. 예전엔 선배들이 머리를 올린 후배에게 메스를 넣고 수술날짜를 새긴 기념액자를 선물해주는 관행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고.
“남들은 외과의사더러 ‘칼잡이’라고 부르죠. 성적 좋은 인재들이 몰리고 연구활동을 많이 하는 내과에선 우리한테 ‘무식한 외과의사’라고도 해요. 몸으로 때우는 일이 많다 보니 우리끼리는 ‘일용직 노동자’라고도 하고요. 허허허.”
야망을 위해 권모술수를 마다 않는 ‘하얀 거탑’의 엘리트 외과과장 장준혁은 현실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이날 접한 김 교수에게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료인의 풍모가 묻어났다. 결코 무식과는 거리가 먼.
오후 1시를 조금 넘겨 수술이 종료됐다. 통상 대장암 수술에 걸리는 시간은 2시간~2시간 30분. 복강경 수술엔 해당사항이 없지만, 환자의 배를 열고 닫는 데만 1시간은 족히 걸린다. 직장암의 경우 수술시간은 3시간~3시간 30분이다.
이제 김 교수는 늦은 점심식사를 서둘러 마친 뒤 또다시 외래환자 진료에 나설 것이다. 그는 “30, 40대 젊은 대장암 환자들을 잘 치료해 가정과 직장으로 빨리 복귀시킬 때 외과의사로서의 보람을 느낀다”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수술실 안에서 주치의가 직접 수술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주치의가 집도하므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꼭 써달라”며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중앙수술실을 빠져나와 수술환자 가족 대기실 앞을 지나는데 어디에선가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이 귓전을 파고든다. 세브란스병원이 인근 교회의 음악성가단과 함께 점심시간대에 30분씩 열고 있는 간이음악회다. 조금 전 수술을 받은 노인 이씨 또한 합병증만 없다면 며칠 뒤 이 음악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