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행(48). 최근 그가 민주노총 5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자 각계에서는 “온건파가 당선됐다” “노사정 대화의 물꼬가 틀 것이다”라며 기대를 나타내고 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 역시 “합리적인 사람이다” “참 선하다” “말이 통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일각에서는 “조직 내 강경파와 마찰을 빚을 것이다”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그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이 위원장은 1958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부 일을 시작해, 낮에는 광산에서 일하고 밤에는 재건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재건학교는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일하면서 배워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모토로 설립한 교육기관. 이곳에서 공부하던 그는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중학교 졸업장을 받은 뒤 전북기계공고에 입학했다.
1977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상공부 장관 추천으로 대동중공업에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게 됐다’며 한시름 놓으려는 순간, 그에게 현실은 싸늘하게 다가왔다.
“정밀가공사 자격증만 따면 잘살 수 있다고 해서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이 위원장)
일당 770원. 한 달에 30일을 일해도 2만3100원밖에 못 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그는 매달 10만원씩 집으로 가져갔다. 휴일 및 연장 근무, 야근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랍답게 살고 싶었다.
1980년 이 위원장은 “노동조합을 만들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대동중공업 노동조합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4년 한국노총에서 ‘새마을 교육’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학습에 매진해 김금수(전 노사정위원장), 천영세(민주노동당 의원), 문성현(민주노동당 대표) 씨 등과 인연을 맺었다.
1991년 대동중공업이 두원그룹에 매각된 뒤, 그는 보안사의 정치사찰 대상에 자신이 포함된 사실을 알고 항의하다가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사무차장(91년)과 전국자동차산업연맹 부위원장(95년),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98년)을 지냈으며 2004년에는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텐트 하나 짊어지고 산하 사업장을 돌아다녔고, 분규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투쟁 전면에 나섰다. 그 결과 그는 실형을 7번이나 선고받았고, 전과가 쌓여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없는 처지가 된 탓에 비정규직 신분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듯 이 위원장의 이력 어디에서도 그가 ‘온건파’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굳이 그를 ‘온건파’로 분류한다면, 그 이유를 투쟁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의 이야기다.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고 관철시킨다는 기본 입장은 5대 집행부 들어서 오히려 더 강해질 것이다. 단, 과거에는 강경투쟁 위주로 목적을 관철해나갔다면 이제부터는 상대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나갈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대화와 타협도 있을 수 있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온건하다’고 표현한다면, 이 위원장은 온건파다.”
이 위원장은 1958년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부 일을 시작해, 낮에는 광산에서 일하고 밤에는 재건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재건학교는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이 ‘일하면서 배워 나라를 다시 세우자’는 모토로 설립한 교육기관. 이곳에서 공부하던 그는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중학교 졸업장을 받은 뒤 전북기계공고에 입학했다.
1977년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상공부 장관 추천으로 대동중공업에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게 됐다’며 한시름 놓으려는 순간, 그에게 현실은 싸늘하게 다가왔다.
“정밀가공사 자격증만 따면 잘살 수 있다고 해서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이 위원장)
일당 770원. 한 달에 30일을 일해도 2만3100원밖에 못 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그는 매달 10만원씩 집으로 가져갔다. 휴일 및 연장 근무, 야근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랍답게 살고 싶었다.
1980년 이 위원장은 “노동조합을 만들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대동중공업 노동조합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4년 한국노총에서 ‘새마을 교육’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학습에 매진해 김금수(전 노사정위원장), 천영세(민주노동당 의원), 문성현(민주노동당 대표) 씨 등과 인연을 맺었다.
1991년 대동중공업이 두원그룹에 매각된 뒤, 그는 보안사의 정치사찰 대상에 자신이 포함된 사실을 알고 항의하다가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사무차장(91년)과 전국자동차산업연맹 부위원장(95년),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98년)을 지냈으며 2004년에는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텐트 하나 짊어지고 산하 사업장을 돌아다녔고, 분규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투쟁 전면에 나섰다. 그 결과 그는 실형을 7번이나 선고받았고, 전과가 쌓여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없는 처지가 된 탓에 비정규직 신분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듯 이 위원장의 이력 어디에서도 그가 ‘온건파’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굳이 그를 ‘온건파’로 분류한다면, 그 이유를 투쟁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의 이야기다.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고 관철시킨다는 기본 입장은 5대 집행부 들어서 오히려 더 강해질 것이다. 단, 과거에는 강경투쟁 위주로 목적을 관철해나갔다면 이제부터는 상대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나갈 예정이다. 그 과정에서 대화와 타협도 있을 수 있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을 ‘온건하다’고 표현한다면, 이 위원장은 온건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