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 중인 한 럭셔리 브랜드 매장 입구에 길게 늘어선 쇼핑객들.
파리 생토노레의 에르메스 매장에서 일하는 프랑스 친구에게서 작전명 같은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는 물건이 동나기 전에 얼른 뛰어가라고까지 말했다.
파리에서 에르메스도 세일을 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구찌, 디오르, 샤넬 등 다른 럭셔리 브랜드처럼 세일 기간에 맞춰 신문광고를 하거나 매장 내에서 눈에 띄게 할인 행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몰래’ 매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사장을 대관해 세일을 한다니 도대체 어떤지 궁금했다.
세일 둘째 날 저녁, 친구가 일러준 주소로 찾아갔더니 웬 극장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세일을 한다는 표지는 전혀 없고 직원만 몇 명 나와 손님을 맞았다.
몇 분간 줄을 선 뒤 들어간 행사장의 규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럭셔리한 손님들이 소재에 따라 수천만원대를 오르내리는 에르메스 ‘켈리 백’을 한 팔에 낀 채 매장 한가운데에서 치마나 바지를 갈아입어보는 모습이 무척 이색적이었다. 꼭 초대장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소문이 나지 않아선지 외국인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매장 분리, 문구 작게 표시 등 묘안 마련
넥타이 섹션 위로 내걸린 ‘넥타이 모두 67유로’ 푯말이나, 스카프 섹션 위의 ‘스카프 140유로부터’라는 안내문은 이 가격들을 원화로 환산하면 약 8만원과 17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임에도 그것을 잊게 할 만큼 유혹적이었다. 물론 실제 매장에서 판매하는 것보다는 절반 이상 쌌다. 매장에서 이 스카프는 320유로(38만원), 넥타이는 145유로(17만4000원)에 팔린다.
매년 1월과 7월, 파리의 온 도시에서 전격적으로 펼쳐지는 세일 행사에서 많은 파리지앵들이 노리는 품목 1위는 역시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의 물건이다. 세일 첫날, 브랜드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에르메스는 이런 경쟁 브랜드들과 달리 세일 행사장과 매장을 분리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 전략으로 평소에는 고이 접어 유리 전시대 밑에 두었던 제품이 사람들의 손을 타며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적어도 매장 안에서는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명품 브랜드 가운데서도 최고가 전략을 자랑하는 도도한 엘리트 브랜드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런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실제로 세일 기간, 아무렇게나 판매대에 굴러다니는 명품 브랜드들의 제품을 보면 왠지 싸구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파리의 진짜 부자들은 절대 세일 기간에 명품 브랜드 매장에 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한편 온 도시가 세일을 하는 와중에도 절대 ‘노 세일’ 정책을 펼치는 유일한 브랜드는 루이뷔통이다.
루이뷔통이 ‘노 세일’을 유지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계 럭셔리 업계의 절대강자 LVMH의 비호 아래 매년 훌륭한 경영 성적을 내고 있어 재무 면에서 큰 부담이 없다는 점, 둘째는 다른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에 비해 옷보다는 가방, 액세서리 등의 판매 비중이 높다는 점이다. 계절이 지나면 지난 시즌 옷들을 반드시 팔아치워야 하는 다른 브랜드보다 재고 부담이 덜한 데다 잘 팔리는 가방 라인은 모두 시즌을 타지 않고 꾸준히 팔린다.
명품 브랜드들에게 세일은 일종의 ‘필요악’이다. 원활한 경영을 위해 안 할 수는 없지만 세일 기간에 브랜드 이미지가 다소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브랜드들은 세일과 관련해 갖가지 묘안을 짜낸다. 매장에 ‘세일(soldes)’이라는 문구를 최대한 작게 표시해놓거나 알고 찾아오는 손님에게만 할인해주는 방식 등이다.
세일 기간, 파리에서 명품 브랜드 제품을 구입할 생각이라면 두 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첫 3일간 쇼핑을 마칠 것(품절되므로). 그리고 세일 기간을 선전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매장 직원에게 물어볼 것(세일을 원래 기간보다 먼저 시작하는 경우도 빈번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