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호계마을에 있는 임선미의 비석과 사당.
순창군은 전국에서 제1의 장수 고을로 꼽힌다. 2002년 서울대 의대 노화연구소에서 전국 자치단체 장수실태를 조사했는데, 인구 10만명당 29명꼴로 100세 이상 노인이 살고 있어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65세 노인 인구도 23%를 차지해 전국 평균인 7.4%를 훌쩍 넘어섰다. 그런 순창군에서도 가장 장수 마을로 꼽히는 호계마을에 임선미의 비석과 사당 호계사(虎溪祠)가 있었다.
순창에 임선미 기리는 사당 지어
호계마을은 어귀에 들어서서야 전경이 보일 정도로, 산자락에 오목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을의 형상이 날개를 펴고 있는 매와 같아 예전엔 응동(鷹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안에는 효자비와 열녀 정려문이 있고, 변씨 재각(齋閣)도 있었다. 마을 전경도 편안하지만, 충효의 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동네라 더욱 편하게 여겨졌다. 이 마을엔 70가구쯤 사는데 이 가운데 임선미의 후손들이 30가구쯤 된다.
임선미의 위패가 모셔진 호계사.
임선미의 호는 두문제(杜門霽)로 두문동의 얼굴과 같은 존재다. 조선 영조 1751년 10월21일에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첫 제사를 지낼 때, 낭독했던 사제문(賜祭文)에 “오직 조씨(曺氏), 임씨(林氏), 맹씨(孟氏) 성을 가진, 전하는 사람은 이 셋뿐이고 나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라고 했다. 이때 조씨는 조의생(曺義生)이고, 임씨는 임선미다. 맹씨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고, 훗날 맹호성(孟好誠)이라고 지칭했으나 맹씨 족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두문동 삼절(三節)로 꼽히는 이들은 열혈 청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친다면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굳세게 자기주장을 펴는 대학생쯤 될 것이다. 실제 임선미는 관리가 아니라 성균관 태학생이었다. 조의생도 임선미와 가까웠고,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면 그 또한 태학생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전남 화순 어은골에 있는 임선미의 사당 송월사와 임씨들의 사당 담락제.
임선미가 순절했을 때의 나이가 33세였다. 급작스런 죽음 때문에, 그가 쓴 글도 그에 관한 기록도 하나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의 행적이라곤 태학생 신분으로 두문동에 든 것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정몽주나 박상충(朴尙衷)처럼 3년 시묘를 선구적으로 행했던 것만 전할 뿐이다.
인구조사 통계상 순창 임씨 100여호 불과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용배(用培)와 셋째 용계(用桂)는 전라도 순창으로 내려가고, 둘째 용달(用達)은 개성에 남았다. 두 아들이 순창으로 내려간 것은 임선미의 아버지 임중연(林仲沇)이 원나라에 체류하면서 고려 충숙왕을 잘 보필한 공로로 순창군에 봉군(封君)된 인연 때문이다. 순창군 임중연은 순창읍 장덕리에 허리가 잘록한 벌 명당에 묻혔는데, 임선미가 3년 동안 시묘한 곳도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선미의 아들 용배와 용계의 무덤은 할아버지 순창군을 모시듯 그 밑에 있었다. 그러다가 훗날 용배의 장손이 전남 화순으로 옮겨가 살면서 용배의 무덤이 화순 송월사로 옮겨가고, 용계의 후손들은 충남 홍성으로 옮겨가 살면서 용계의 무덤도 홍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호계사 담 너머로 보이는 호계마을의 전경.
조선을 부정하고, 목숨까지 내던진 선조 때문에 순창 임씨 후손들은 간신히 명맥을 잇고 살아왔다. 순창에 사는 후손들도 크게 출세한 사람이 없고, 그저 순창 관아의 아전을 지내면서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사당이 있다고 전화 제보를 했던 임선광(林宣光·75) 씨는 “임씨들은 대체로 기가 세고 성질이 급한데, 선미 할아버지 역시 강직하고 불같은 성질을 가지셨던가 봐요”라고 했다. 흔히 임씨들을 두고 호랑이에 비유하는 것도 이런 성미 때문인데, 목숨까지 내던지고 충절을 지킨 임선미의 기상은 가히 호랑이 같다고 찬할 만하다. 그 때문인지 임선미의 사당이 순창 호계(虎溪)마을에 있고, 호계사(虎溪祠)라 칭해지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