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진 전 로버트 김 후원회장 선우 사장
그러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환대는 대단했다. 김 선생은 방한 기간 내내 하루 6, 7건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본인이나 수행하는 우리 모두 범 국민적 환대에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 되었다.
참으로 많은 국민들이 각자의 가치관과 이념과 생각을 접어두고, 김 선생을 중심으로 한마음이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회 통합을 경험했다.
국민들은 로버트 김 사건이 발생한 1996년부터 근 10년 동안 뚝배기처럼 식지 않는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 관심은 ‘신세 진 것을 잊지 않고 꼭 갚겠다’는 의리의 표현이었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인정의 발로였다. 5000년 역사를 이어오게 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동력이 로버트 김 사건과 김 선생의 방한을 통해 오랜만에 표출된 것이다.
이번 방한에서 김 선생은 감동적인 두 개의 장면을 연출했다. 로버트 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그가 미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그의 구속을 모른 척해 김 선생과 우리 정부 관계는 다소 껄끄러워졌다. 하지만 이후 우리 정부는 김 선생의 조기 석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에 대해 김 선생은 ‘사건 당시 나를 도울 수 없었던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후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펼친 노력도 인정한다’고 밝혀 우리 정부와의 화해 의사를 내비쳤다.
또 하나의 장면은 로버트 김으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은 백동일 전 대령과의 만남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한 사람은 피해자이고, 한 사람은 가해자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사건으로 인해 승승장구하던 인생이 꺾이며 큰 상처를 입었다. 그 깊고 큰 상처를 9년 만에 만나 뜨거운 포옹과 눈물로 풀어버렸다.
보수와 진보, 여야 구분 없이 로버트 김에 대한 공감대 형성
로버트 김 사건이 던져준 화두는 여전히 분단돼 있는 조국의 현실이다. 북한과의 대치를 상징하는 철조망이 가까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낸다. 로버트 김 사건은 새삼 우리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김 선생은 투옥 중 부모님의 부고를 접했다. 또 그의 가족들은 자판기에서 뽑아낸 음식을 앞에 놓고 김 선생의 환갑상을 차렸다고 한다. 그가 이런 고초를 겪어야 했던 것은 분단 때문이다. 분단 때문에 그는 한 번 만난 인연밖에 없는 백 대령에게 정보를 전해줬다가 영어의 몸이 된 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분단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풀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로버트 김의 방한은 감사, 화해와 희망으로 엮어진 사건이었다. 9년 전 우리가 김 선생에게 상당한 신세를 졌다면, 이제는 김 선생이 한국민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도움에 대해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서로는 화해하고 감사해한 것이다. 악연(惡緣)을 선연(善緣)으로 바꾼 이 일을 우리는 자축해야 한다.
4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아온 김 선생에게 한국의 현실에 맞는 활동을 하라는 것은 막연한 요구였다. 따라서 이번 방한은 그가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방한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미국 생활과 수감 생활, 그리고 미국 공무원 생활을 통해 경험한 것을 한국 현실에 맞게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리된 ‘로버트 김의 편지’가 매주 수요일 독자들에게 발송되고 있다(www.robertkim.or.kr).
김 선생은 대가를 위해 정보를 넘기지 않았다. 그는 지위나 인맥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때문에 한국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이기에 충분히 조국에 대해 올바른 조언을 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