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방송인 아리랑TV는 한류의 중심 매체로 자리잡으며 전 세계인에게 한국의 브랜드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방송 1000회를 맞이한 아리랑TV의 대표 프로그램 ‘Heart to Heart’, 일반인 대상 영어 퀴즈 프로그램인 ‘Quiz Champion’, 한국의 음식 문화를 소개하는 방송 장면(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국 대표 위성방송 자리매김
그러나 이 같은 상상은 잠시 보류해둬야 한다. 현재 아리랑TV를 통해 선보이는 드라마는 4~5년 전에 방송된, 시대에 뒤떨어지는 작품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최신 드라마를 최대 수익원으로 생각하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위성방송’인 아리랑TV에 보석 같은 콘텐츠를 헐값에 넘길 리 만무한 일. 적어도 3~4년이란 시간이 흘러 대장금을 더 이상 해외에 팔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야, 이 드라마는 아리랑TV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방송인 아리랑TV가 처한 두 가지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첫째는 아리랑TV가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위성방송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그 위상을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해 방송을 통한 국가 이미지 홍보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랑TV의 진정한 가치는 KBS나 MBC 등 지상파 방송사가 장악한 대한민국 땅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다. 그러나 한 발짝만 해외로 나가보면 ‘한류의 숨은 조력자가 아리랑TV’라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나아가 ‘한류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리랑TV’라는 극찬까지 내놓게 된다.
아리랑TV는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 4개 언어를 통해 세계의 안방에 한국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88개국 5300만 가구, 1000여개 주요 호텔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아리랑TV 관계자들은 “한류는 몇몇 인기 드라마와 인기 가수의 콘서트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아리랑TV가 꾸준히 한국 문화를 전파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아리랑TV가 한류에 공헌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들은 “음반이나 드라마가 정식으로 수출되지 않았는데도 해외에서 우리 연예인을 알아보고 열광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아리랑TV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아리랑TV에 무관심했던 연예인들도 서서히 해외의 한류 팬들을 의식해 아리랑TV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아리랑TV는 ‘Screen Flash’를 통해서는 최신 한국영화들을 소개하고 ‘Pops in Seoul’을 통해선 유행을 선도하는 한국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한류에 대해 아시아 시청자들이 ‘뿅’ 가는 것은 불문가지. 이어 한국의 음식과 공연, 건축, 패션 등을 소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한국을 홍보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인기 프로그램이 가수 ‘소이’가 진행하는 ‘Pops in Seoul’이다. 5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한국 대중가요의 세계화에 일등공신이 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아리랑TV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되고 있다.
음반은 물론 음식·공연 등도 소개
아리랑TV는 지난해부터 케이블뮤직 채널인 Mnet과 함께 ‘K-pop 최고의 뮤직비디오’ 해외 누리꾼(네티즌) 투표를 실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60만명 이상이 몰리고 있는 것. 60만은 세계 각국에 불고 있는 한류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숫자가 아닐 수 없다.
‘Pops in Seoul’의 정춘길 PD는 “문화란 간헐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소비자와 함께할 때만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 전령사는 결국 방송이 될 수밖에 없다”며 강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아리랑TV는 한류뿐만 아니라 한국의 IT(정보기술)와 BT(생명공학 기술) 산업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가 되고 있다. 그로 인해 제고되는 대한민국 브랜드 가치는 추정이 불가능할 정도. 아리랑TV의 위력은 11월16일 한국을 방문한 불가리아 첼리스트 키릴로바 모녀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불가리아 제2의 도시 바르나에 살고 있는 키릴로바(44) 씨는 우연한 기회에 아리랑TV에서 ‘Let’s speak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동양과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이어 ‘사운드 & 모션’이라는 아시아 음악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딸인 카멜리야(17)는 한국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논스톱’을 즐겨 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지역 유선방송 사업자가 아리랑TV 전송을 중단하자, 키릴로바 씨는 평소 아리랑TV를 즐겨 보던 주민 212명에게서 서명을 받아 방송을 재개케 하는 ‘거사’를 이뤄냈다. 그 후 그녀는 한국 문화에 더 빠져들게 됐고, 결국 딸과 함께 한국에서 첼로로 ‘아리랑’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키릴로바 씨 사연에 아리랑TV 관계자들이 감격한 것은 당연지사.
아리랑TV는 1995년 당시 공보처가 제시한 ‘선진방송 5개년’ 계획에 출범했다. 이때 생각했던 아리랑TV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한국을 찾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영어 케이블방송을 하는 것. 그리하여 97년부터 케이블방송으로 아리랑 TV가 송출됐는데, 이때만 해도 설립 주체는 법적인 토대를 구축하지 못하고 비영리 재단법인인 (재)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 국제방송)을 통해 운영됐다.
이듬해 정부가 아리랑TV를 해외홍보용 운영 주체로 지정하고, 99년엔 위성방송이 본격화하면서 상황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영어방송이라는 특수성이 위성방송과 결합하면서 해외 진출이라는 과제가 아리랑TV에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시작은 미미했다.
전 세계의 위성 채널은 500개가 넘는다. 그런데 각 가정에 들어갈 수 있는 채널은 보통 50~70채널 정도. 아리랑TV가 성공하려면 가정에 들어가는 채널을 차지해야 하는데 첫해엔 어떤 케이블 사업자(SO)도 선뜻 재전송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300여개 지역 SO와 계약을 맺고 채널권을 확보해놓고 있다.
이처럼 아리랑TV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중국과 일본이 이 분야 진출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리랑TV의 최대 경쟁자는 중국의 영어방송인 CCTV-9과 일본의 NHK-월드. 일본은 한국보다 국제화는 빨랐지만 위성방송은 늦었던지라 선점 효과를 아리랑TV에 빼앗겼다. 중국의 CCTV-9 역시 막강한 해외 화교문화권을 갖고 있지만 출발이 늦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방송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현재 이 두 국가는 국가적인 지원을 통해 ‘아시아 대표방송’의 위치를 노리는 중이다.
그러나 아리랑TV를 위협하는 ‘적’은 이웃 국가 위성방송의 도전보다는 국내의 미적지근한 반응이다. 아리랑TV와 KBS-월드가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 국가대표 방송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두 방송의 발전 방향이 겹쳐지면서 중복 투자라는 시비가 나오고 있다.
아리랑TV의 법적 취약성도 방송의 미래를 불안케 하는 요인이 된다. 2005년 아리랑TV는 전체 예산의 60% 이상을 방송발전기금(268억원)에서 충당하고 있는 상황. 국고보조금은 5%에도 못 미치는 20억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것이 방송 질 저하로 이어질 수도 있어 아리랑TV 내부에서는 ‘아리랑국제방송 공사’로 발전시키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국내 시청률이 낮다 보니 광고 수익이 미미한 것도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 소식을 주로 전하는 뉴스 보도팀은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아리랑TV 자체가 한국이라는 콘텐츠를 전 세계에 서비스하는 것이다 보니 뉴스 보도팀은 홍보성 기사를 주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것.
11월22일 부산에서 막을 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아리랑TV에는 도전이자 희망을 안겨준 행사였다. 주관 방송사인 아리랑TV는 위성 DMB방송을 통해 부산 APEC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어로 된 콘텐츠를 한국인의 시선으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리랑TV 보도팀 이지윤 팀장은 “아리랑TV는 한국 소식을 영어로 제공하는 단순 매체가 아닌 CNN 같은 글로벌 매체로 성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이 같은 희망은 아리랑TV 구성원 모두에게서 엿볼 수 있다. 과연 아리랑TV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채널을 넘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채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