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일원에서 멧돼지 개체 수가 크게 늘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고? 내 이름은 멧돼지다. 진화의 어느 갈림길에서 우리와 엇갈린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름 지었다. 나는 태어나 보니 멧돼지였다. 사람도 귀가 빠져보니 인간 아니었는가.
재미없더라도 내 얘기를 좀 해보겠다. 나는 맹수가 떠난 숲의 대장이다. 나는 사람과 다르게 야행성이다.힘도 세고 헤엄도 잘 친다. 식성은 사람을 닮았다. 본래는 채식을 좋아하는데, 토끼·들쥐·물고기·곤충을 가리지 않고 먹는다.
나는 다리가 짧고 눈이 어둡다. 대신 사람보다 뛰어난 코와 귀로 생존경쟁을 이겨나간다. 나는 무척 빠르다. 1시간에 40km를 간다. 싸움을 먼저 걸지는 않는다. 등산객 냄새만 맡아도 도망가는 게 우리다. 그러나 시비를 걸어오면 응전한다.
우리가 유해 동물이라고? 한강에서 모터보트에 구타당하고 도심의 궁궐에서 총에 맞아 죽었는데도 사람들은 우리를 흉악하다고 말한다.
내가 보기엔 인간이 지구에 가장 큰 해를 끼친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오면 사람보다는 개미와 얘기하고 싶어할 것이다. 개미는 똑똑하지만 사람처럼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들이 지구의 주인(主人)인 줄 안다.
“멧돼지들이 똑똑해서 막을 방법이 없다”
人 경기 양평군 서종면 도장2리의 야산. 봉분은 곳곳이 파헤쳐졌고, 멧돼지 발자국이 곳곳에 나 있다. 야산에 멧돼지가 나타난 건 지난해부터다.
“멧돼지 때문에 농사를 지어야 할지 접어야 할지 고민이다. 이놈들은 똑똑해서 막을 방법도 없다.”
추수를 마친 홍종성(51) 씨는 분이 풀리지 않은 눈치다. 멧돼지가 남겨놓은 흔적은 그의 논이 입은 피해를 짐작케 한다.
9~10월 멧돼지는 나락을 닥치는 대로 훑어먹었고, 논을 침대 삼아 뒹굴었다. 벼를 쓰러뜨려 새로 길을 내기도 했다. 멧돼지가 논을 파서 ‘우물’까지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홍 씨는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논이 엉망이 돼 있어요. 철조망도 쳐보고, 비탈도 깎아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암컷 1마리가 7마리의 새끼를 끌고 그의 논을 습격한 일도 있었다. 자동차 전조등 빛을 보고 도망가는 멧돼지들은 느긋하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암컷 1마리가 새끼 3마리를 이끌고 대낮에 나타나기도 했다.
허보행(경기 양평군 서종면 도장2리 이장) 씨가 멧돼지가 습격한 논을 보며 허탈해하고 있다.
멧돼지가 쓰러뜨려 놓은 벼는 수확되지 못해 낱알이 붙은 채로 방치돼 있었다. 멧돼지들은 가을걷이로 논에 먹을 게 줄어들자, 소 주려고 남겨놓은 볏단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
멧돼지가 사람에게 끼치는 피해는 생각보다 크다. 농작물을 파헤쳐 못쓰게 만든 멧돼지를 원망하는 농민의 표정은 씁쓸하다. 멧돼지 가족이 다녀가면 한 해 농사가 거덜나기도 한다.
전남의 경우 야생동물(주로 멧돼지)에 의한 피해는 2001년 5억7116만원에서 2004년 23억2009만원으로 3년 만에 4배 가까이 뛰었다.
멧돼지 내가 사람 세상으로 내려가는 건 내가 사는 산에 먹을 게 없어서다. 나도 사람들처럼 섹스를 좋아한다. 러브는 12월에서 1월 사이에 하는데, 암컷 한 마리를 놓고 수컷들이 쟁탈전을 벌인다. 권력투쟁에서 이기려면 잘 먹어야 한다.
겨울철 나는 살이 쪽 빠진다. 암컷과 러브하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짝짓기를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 먹을 것은 점점 더 줄어든다. 사람들이 도토리니 뭐니 먹을 만한 건 다 거둬간 탓이다.
멧돼지는 12~1월에 교미하는데, 한 번에 7~13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수컷은 두 살 무렵 고환이 발달되면 어미한테서 쫓겨난다. 근친 간의 짝짓기로 종자가 나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홀로 떨어진 수컷 중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친구들은 좁아진 숲에서 먹이와 암컷을 차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암컷과 먹이를 차지하지 못한 이들 외톨이 수컷 ‘친구’가 논에서 벼를 훑어먹거나 도심으로 흘러 들었을 것이다.
“멧돼지 등장은 생태계 파괴에 대한 경고”
人 허보행(43) 경기 양평군 서종면 도장2리 이장은 지난해까지는 마을에 멧돼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없었다기보다는 민가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2004년 서울 종로구 청운중학교 뒷산에 나타난 멧돼지. 마취총을 여러 발 맞고 죽었다.
그러나 서울과 경기는 총포 사용이 제한적이어서 다산 동물인 멧돼지가 30년 넘게 개체 수를 늘려왔다. 멧돼지는 환경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데다, 한 번에 7~13마리의 새끼를 낳을 만큼 번식력이 뛰어나다.
멧돼지가 인간 세상까지 내려온 것은 녹지를 파헤친 개발 때문이기도 하다. 도로 건설로 서식지가 조각조각 나뉘고, 아파트 건설 등으로 개발제한구역이 줄어들면서 늘어난 개체 수를 수용할 만한 공간과 먹이가 부족해진 것이다.
한성용 야생동물연구소 소장은 도심의 멧돼지 출현에 대해 “개발로 살 곳이 준 멧돼지가 도심으로 넘어와 길을 잃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한상훈 국립공원관리공단 반달가슴곰팀장은 “멧돼지의 등장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동물들의 마지막 경고”라고 주장했다.
멧돼지 내가 도심에까지 뛰어든 건 사람들의 설명처럼 식구들 수가 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람을 빼면 나의 천적은 없다. 나의 활동 영역은 100ha(약 33만평)에 이르지만, 개발이 진행되면서 살 곳이 없어졌다. 살 곳은 점점 줄어드는 데 물색없이 수만 늘고 있는 셈이다.
나를 쫓기 위해 호랑이 똥을 산다고? 내가 호랑이 똥을 무서워한다니 웃기는 얘기다. 난 한 번도 호랑이 똥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나의 DNA는 삵이나 여우, 늑대 냄새도 잊은 지 오래다.
저돌(猪突)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데,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영리하다. 농민들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사람이 있는 것처럼 꾸며놓아도 내 귀와 코는 안전하다고 가르쳐준다. 경광등을 달아놓으면 내가 도망간다고? 웃기는 소리다. 나는 경광등 아래에서 도토리를 주워 먹기도 했다.
나와 사람이 공존할 수는 없을까. 숲과 숲을 잇는 생태 통로만 제대로 만들어도 도심에 뛰어들거나, 로드 킬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무조건 잡아 죽이면 후회할 것이다. 내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아니다. 반론이 있겠으되 내가 보기엔 거꾸로다.
人 퍽!
10월 중순 사냥꾼 김영운(51·경기 양평군 서종면) 씨는 마을 야산에서 200kg이 넘는 멧돼지한테서 공격을 당했다. 다행스럽게도 김 씨는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으나 수백만원에 이르는 사냥개 3마리가 크게 다쳤다.
“멧돼지에 받쳐 죽을 뻔했다. 가을, 겨울철 멧돼지 사냥은 무섭다.”
사냥개 3마리가 멧돼지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멧돼지와 엉겨붙었다. 그러나 그는 총을 쏠 수 없었다. 낙엽이 깊게 쌓인 곳에서 개와 멧돼지의 다툼이 벌어져 멧돼지를 정확하게 겨냥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냥 경력 15년의 그는 야행성인 멧돼지를 뿌리뽑으려면 밤 사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 멧돼지 사냥은 목숨 걸고 하는 짓이란다. 어둠 속에서 멧돼지가 마음먹고 덤비면 총을 들어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
그는 수렵 시즌을 맞아 강원 춘천시에서 사냥을 한다. 환경이 좋아 멧돼지들이 마을에 내려오지는 않지만, 야산마다 개체 수가 많아 운이 좋으면 하루에 서너 마리를 잡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뒷산의 멧돼지를 잡는 건 쉽지 않다. 개체 수가 적은 데다 낮엔 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가에 피해를 주는 멧돼지를 잡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봄과 초여름이 그나마 잡기가 쉬운데, 그때는 멧돼지가 마을 근처엔 얼씬거리지 않는다.”
경찰청은 멧돼지 사냥을 쉽게 하기 위해 살상력이 강한 공기총과 엽총을 개인이 소지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총포 등 단속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이렇듯 일부 개정하기로 한 것은 물론 멧돼지에 의한 농작물 피해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멧돼지의 수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高)출산으로 신음하는 멧돼지 집단을 인위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정 수준’에 있다. 무분별한 수렵은 되돌아온 ‘친구’를 여우, 늑대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멧돼지 잡는다는 핑계로 야생동물 싹쓸이?
멧돼지 5월24일, 9월29일, 10월19일, 10월24일, 10월30일, 11월10일…. 내가 도심을 쏘다닌 날이다. 전국의 내 친구들은 20여만 마리로 추산된다. 서울 인근에만 1만여 마리가 살고 있다. 수락산, 불암산, 검단산, 북한산의 깊은 곳이 우리들이 사는 곳이다.
나 때문에 엽총의 성능을 업그레이드 한다고? 나를 잡는다는 핑계로 사람들은 값비싼 다른 야생동물을 모조리 잡아댈 것이다. 나 때문에 사냥에 대한 규제가 줄어들면서 밀렵꾼들은 더욱더 활개치고 있다.
숨이 붙어 있는 야생동물은 건강원에 보신용으로 넘겨진다. 천연기념물은 박제로 둔갑해 박물관이나, 박제상에 납품된다. 사람이 사로잡거나 죽인 야생동물은 산양 500만원, 오소리·독수리 100만원, 노루 80만원, 고라니 50만원에 거래된다.
나는 흔해빠져서 값이 훨씬 싸다고 들었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살코기 가격은 조금 올랐다고 한다. 웃기는 일이다.
사람들이여, 제발 나에게 시비를 걸지 마라. 그러면 나무뿌리를 자를 만큼 가공할 나의 송곳니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나를 만나면 뛰지 말고 가만히 멈추어 서라. 그러면 내가 자리를 피할 것이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면 내가 놀라 공격할 수도 있다.
울산 태화강의 절벽에 새겨진 5000년 전 바위그림에서는 고래와 사슴, 내가 한데 섞여 뛰어 논다. 선사시대 유적인 이 바위그림은 ‘더불어 살기’를 가르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