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개봉된 영화 ‘아일랜드’(사진)의 흥행 성적은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남겼다. 스펙터클한 SF 대작답지 않게, 영화 제작국인 미국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이 영화는 한국에서 탁월한 선전(善戰)을 펼쳤다.
고객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복제인간을 대량으로 ‘배양’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영화에 흥행 요소가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볼거리도 적잖았고 출연진도 탄탄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흥행은 영화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영화 개봉 시점이 마침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것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황 박사 때문에 흥행몰이를 했다는 것은 오히려 아이러니에 가깝다. 이 영화는 황 박사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이 황 박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제작자는 황 박사의 연구결과 발표를 의식해 영화의 배경을 당초 2060년에서 2019년으로 바꿨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는 생명복제 연구가 초래할 수도 있는 음울한 미래상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복제된 산모가 아이를 낳은 뒤 살해되는 장면이나,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사람인 클론이 수술대 위에 묶여 장기를 강제로 추출당하면서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 ‘배아복제’에 대한 뉴스가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여는 복음처럼 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아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산모, 금지된 감정인 사랑을 느끼고 처음 보는 생명체인 나방에 호기심을 보이는 주인공 링컨. 이들이 바로 (영화 속에서나마) 상상 속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복제인간인 것이다.
장기의 ‘품질 관리’를 위해 감정을 전혀 갖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식단만 먹을 수 있는 ‘사육장’에서 고객들의 주문에 의해 생산, 관리되지만 이들의 몸속에는 ‘복제’가 아닌 ‘인간’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영화 속 어느 정상적인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적인’ 이들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접하는 복제인간들은 종종 이렇게 ‘(진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너무도 강렬히 제시됐다.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전직 경찰인 데커드가 탈출한 인조인간들을 하나씩 찾아서 제거해버리는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을 만드는 타이렐 회사의 모토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다.
매끈한 외모에 능숙한 일처리 솜씨. 그러나 이보다 사이보그들이 인간적인 것은 품성까지도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들은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 동료에 대한 희생정신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뒤쫓는 인간들과 비교해 ‘누가 더 인간적인지’를 묻게 한다.
최근 황 박사의 배아복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난자 제공 과정의 적정성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생명 형성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부터 이를 독자적인 생명체로 볼 것이냐에 있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형성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시작한 직후부터 자궁에서 착상되어 태아가 되기 전까지를 일컫는 배아(embryo). 이 ‘배아를 생명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배아를 생명으로 볼 것인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다만 어떤 생명체를 현재의 상태로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체가 갖고 있는 미래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함께 생각한다면, 배아의 정체성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릴 일은 아닐 듯하다. ‘아일랜드’의 링컨은 처음에는 배아로서 팔리고 키워졌겠지만, 번듯한 성인으로 자란 그는 사랑하고 고뇌하는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일랜드’에 쏠린 대중적 관심과 열기는 뒤집어보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빈곤을 반영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의 원조인 ‘프랑켄슈타인’. 저자 메리 셸리는 페미니즘의 창시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로, 셸리와 결혼해 셸리라는 성을 얻은 여성이다. 그녀는 이 소설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흙으로 인간을 만든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빌려와 과학자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줘서 인간의 은인으로 칭송받는 프로메테우스. 그 불은 인간 문명의 원천이지만 또한 많은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다. 21세기의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가져올 진보와 재앙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고객의 유전자와 완벽히 일치하는 복제인간을 대량으로 ‘배양’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영화에 흥행 요소가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볼거리도 적잖았고 출연진도 탄탄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흥행은 영화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영화 개봉 시점이 마침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한 것과 겹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황 박사 때문에 흥행몰이를 했다는 것은 오히려 아이러니에 가깝다. 이 영화는 황 박사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이 황 박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영화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제작자는 황 박사의 연구결과 발표를 의식해 영화의 배경을 당초 2060년에서 2019년으로 바꿨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는 생명복제 연구가 초래할 수도 있는 음울한 미래상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복제된 산모가 아이를 낳은 뒤 살해되는 장면이나,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사람인 클론이 수술대 위에 묶여 장기를 강제로 추출당하면서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 ‘배아복제’에 대한 뉴스가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여는 복음처럼 들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아이를 뺏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산모, 금지된 감정인 사랑을 느끼고 처음 보는 생명체인 나방에 호기심을 보이는 주인공 링컨. 이들이 바로 (영화 속에서나마) 상상 속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복제인간인 것이다.
장기의 ‘품질 관리’를 위해 감정을 전혀 갖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식단만 먹을 수 있는 ‘사육장’에서 고객들의 주문에 의해 생산, 관리되지만 이들의 몸속에는 ‘복제’가 아닌 ‘인간’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영화 속 어느 정상적인 인간들보다 더욱 ‘인간적인’ 이들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접하는 복제인간들은 종종 이렇게 ‘(진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너무도 강렬히 제시됐다.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전직 경찰인 데커드가 탈출한 인조인간들을 하나씩 찾아서 제거해버리는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을 만드는 타이렐 회사의 모토는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다.
매끈한 외모에 능숙한 일처리 솜씨. 그러나 이보다 사이보그들이 인간적인 것은 품성까지도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이보그들은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 동료에 대한 희생정신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뒤쫓는 인간들과 비교해 ‘누가 더 인간적인지’를 묻게 한다.
최근 황 박사의 배아복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난자 제공 과정의 적정성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생명 형성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부터 이를 독자적인 생명체로 볼 것이냐에 있을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형성된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시작한 직후부터 자궁에서 착상되어 태아가 되기 전까지를 일컫는 배아(embryo). 이 ‘배아를 생명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배아를 생명으로 볼 것인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다만 어떤 생명체를 현재의 상태로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체가 갖고 있는 미래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함께 생각한다면, 배아의 정체성에 대한 결론을 함부로 내릴 일은 아닐 듯하다. ‘아일랜드’의 링컨은 처음에는 배아로서 팔리고 키워졌겠지만, 번듯한 성인으로 자란 그는 사랑하고 고뇌하는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일랜드’에 쏠린 대중적 관심과 열기는 뒤집어보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빈곤을 반영하는 것이다.
복제인간의 원조인 ‘프랑켄슈타인’. 저자 메리 셸리는 페미니즘의 창시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로, 셸리와 결혼해 셸리라는 성을 얻은 여성이다. 그녀는 이 소설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를 붙였다. ‘흙으로 인간을 만든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빌려와 과학자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줘서 인간의 은인으로 칭송받는 프로메테우스. 그 불은 인간 문명의 원천이지만 또한 많은 재앙의 시작이기도 했다. 21세기의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가져올 진보와 재앙의 사이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