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본 씨가 주도해서 제작하고 있는 홍순칠 씨 동상.
이 운동을 펼치는 주인공은 독도연구보존협회 이사인 한송본 씨. 홍순칠 대장과 인척 관계도 아닌 그가 동상 제작을 주도하는 까닭은 ‘국민에 의한’ 독도 지키기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편 홍 씨는 국회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국민에 의한 독도지키기 상징성
홍 씨는 6·25전쟁 상이군인 출신이다. 한국이 6·25전쟁을 치르는 사이 일본은 패전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었다. 1951년 9월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대일강화조약이 1952년 4월28일 발효됐기 때문이다. 이 조약이 발효되기 전까지 일본을 통치(군정)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29일 지령 677호를 통해 일본과 한국(남한)의 행정 영역 구분을 하면서 독도를 한국 행정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5개월 후인 46년 6월22일 나온 지령 1033호에서는 ‘일본인의 어업 및 포경업 허가 구역(일명 맥아더 라인)’을 발표하며 ‘일본인과 일본 선박은 독도 반경 12해리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라고 분명히 규정했다.
그 후 미국은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기 위한 초안 작성에 들어갔는데, 이 조약 5차 초안까지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1949년 12월29일 나온 6차 초안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돼 있었다. 미국 W. J. 시볼드를 고문으로 고용한 일본이 맹렬히 로비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연합국이 이 초안에 동의하지 않아 7차 초안부터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문구가 빠지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약 조인식이 이뤄졌으므로 강화조약문에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한다는 문구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외교의 귀신’인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28일 세칭 ‘이(李)라인’이라고 하는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한국 해양 주권선 안에 확실히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독도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 않은 대일강화조약문이 가져올 오해를 아예 없애버린 것. 이에 대해 일본 조야가 발끈했지만 대일강화조약이 발효(52년 4월28일)되기 전이라 꼼짝하지 못했다.
이 조약이 발효돼 독립정부를 갖게 된 일본은 즉각 이라인을 부정하며 “다케시마(竹島)는 일본 땅”이라고 외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일본 어선이 이라인을 넘자, 이 대통령은 해군을 동원해 사격을 퍼부어 쫓아내거나 나포해버렸다. 그로 인해 300여 척 이상의 일본 어선이 나포됐는데, 이중 상당수가 한국 재산으로 전환되었고 몇몇 일본 어민이 사망했다.
홍순칠 독도 의용수비대장 동상 건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김태홍(왼쪽), 이병석 의원.
작업을 마친 일본 공무원이 철수하자 어민들은 즉각 이 표목을 뽑아들고 울릉군청을 찾아가 사태를 알렸다. 그로 인해 국회까지 발칵 뒤집히게 되었다. 당시의 국회속기록에 따르면 황성수(黃聖秀) 외무위원장이 독도에 상륙한 일본 공무원 임검대(臨檢隊)의 행적을 보고하자, 김정실(金正實) 의원이 3년 전인 6월25일 새벽엔 북한이 남침했는데 6월27일 새벽엔 일본이 북침을 했다고 지적하는 등 격노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전쟁을 치르느라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52년 독도에 영토 표석을 설치하려다 풍랑 때문에 독도 접안에 실패해 뜻을 이루지 못했던 한국산악회가 대신 독도에 들어가 그 사이 일본이 또 박아놓은 ‘시마네현~다케시마’ 표목을 뽑아내고 이 영토 표석을 세웠다(53년 10월15일). 그러나 한국산악회가 철수하자 일본은 다시 독도에 들어와 이 표석을 뽑아내고 그들의 영토 표목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53년이 지나가고 54년이 시작되자 울릉도에 와 있던 제대군인 홍순칠 씨가 독도수비대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임의로 만든 영장으로 울릉도 출신 제대군인을 불러 모아 수비대를 결성하고 부산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소총을 빼내 수비대를 무장시켰다. 이 시대 마지막 ‘의병(義兵) 부대’를 조직한 것인데, 그는 적절한 시기에 ‘관병(官兵) 부대’의 도움을 받는 영민함을 보였다.
당시 홍 씨는 약관 25세의 홍안임에도 김종원 경북경찰국장을 만나 독도 방어를 역설함으로써 경찰국 무기고에 버려져 있던 고물 박격포 한 정과 실탄을 제공받았다. 당시에도 일반인이 무기를 갖고 배를 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홍 씨는 경북경찰국과 울릉경찰서 이름을 적절히 활용해 무기를 갖고 울릉도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고, 이 무기로 수비대원을 무장시켜 독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초사(막사)를 짓고 본격적인 경비에 들어갔으며, 울릉경찰서가 이를 적극 지원했다. 그 후 울릉경찰서는 수비대원 허학도 씨 등을 경찰관으로 채용해 수비대와 울릉경찰서 사이 교신을 맡는 무선사 임무를 맡겨, ‘민관 합동’으로 독도를 지키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1954~56년 훌륭히 지켜내
이러한 수비대는 접근해오는 일본 배를 나포하고 일본 순시선에 박격포를 쏴 사상자를 발생케 했다. 또다시 일본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이때 한국은 국가재정이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중심이 돼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 장관에게 일본 기자들은 “다케시마에 한국군을 주둔시켰느냐”라고 물었고, 변 장관은 “그런 사실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 기자들은 “그럼에도 일본 배들이 희생되는 것은 독도에 해적이 있다는 것 아니냐”라고 하자 변 장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후 일본은 독도에 해적이 있다며 “한국 정부는 하루빨리 이들을 소탕하라. 그렇지 않으면 청구권 자금 협상에 응할 수 없다”며 압력을 가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회는 조사단을 구성해 독도로 보내게 되었다. 이를 전해 들은 수비대 측은 조사단이 오면 해적 논쟁이 일어 골치 아플 것이라 판단해 박격포를 쏴 이들이 탄 배의 접안을 거부했다. 그로 인해 국회는 정부에 대해 현장 조사를 강력히 요구하게 됐는데, 정부는 미군 측에 의뢰해 홍 대장을 잡아오게 했다.
당시 미 7함대 함정은 독도를 지날 때마다 수비대 전마선을 불러 식량 등을 나눠줘 왔는데 이 관계를 이용해 홍 대장을 불러내 나포한 뒤 한국 측에 넘긴 것. 육지로 잡혀온 홍 대장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독도 포격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쯤 되는 것에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홍 대장은 자발적으로 의용대를 만들어 독도를 지켜왔다고 하자 의원들은 포격 사건은 덮어버리고 그를 칭찬해 돌려보냈다.
이 일을 계기로 홍 대장은 독도는 의병이 아닌 관병이 맡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 그해 12월25일 경찰에 독도 방어를 인계했다. 홍 대장이 이끈 수비대는 독도 방어가 가장 취약했던 1954~56년 사이 독도를 훌륭히 지켜낸 뒤 자진 해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송본 씨는 독도에 대한 국민적 사랑을 환기하려면 독도에 홍 씨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해 이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도 영유권 갈등이 컸던 지난봄 독도 특위를 결성했던 국회가 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독도 특위를 이끌고 있는 김태홍 의원(열린우리당)과 이병석 의원(한나라당)의 관심이 컸다.
이들은 국회의원 1인당 5만원씩을 독도연구보전협회 계좌(수협 218-13-002344 독도연구보전협회)에 기탁해 한 씨가 추진하는 일이 성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인 만큼 일반 국민들도 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독도를 지켰던 홍 씨의 동상이 국회의원을 필두로 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독도에 세워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