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치 고갯마루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살을 에는 찬바람을 뚫고 몸을 날렸다. 그들의 손에는 죽창과 낫, 괭이 등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도구들이 들려 있었지만, 이들과 맞선 일본군은 총으로 무장했다. 이들의 싸움은 애초부터 무의미했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창했던 농민혁명군들은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일본군의 총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절규와 함성이 사라진 지 110년이 지난 2004년 2월9일, 16대 국회는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그러나 매우 의미 있는 법안 하나를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근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제7177호)’이라는 긴 이름의 이 법률은 고부(정읍), 무장(고창)을 비롯해 당시 전국에서 봉기했다 사라진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첫 번째 진혼굿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법률이 통과됨으로써 한 세기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동학농민혁명군이 햇볕 아래로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동학농민 후손들 비참한 삶 … 참여자들 명예회복 시급
특별법 공포에 따라 2004년 9월 정부는 국무총리실 소속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유족 등록 및 결정,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 3개 분과로 구성, 운영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들은 동학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호남과 영남, 충청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과정을 통해 짐작으로만, 그리고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동학 주역과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절손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도 아직 유족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경북 성주 및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돼오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할아버지 박성빈 옹의 동학 접주 활동을 간접 확인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순봉 전 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장관, 대학총장들도 동학농민군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족 신청 건수는 아직 미미하다. 2005년 5월 현재 신청 건수는 40여건에 불과하다. 정부는 올해 사업비로 3억6000만원을 배정, 위원들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동학농민의 후손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교도 진압작전을 펴면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몰수라는 극단적 처분을 자행했다. 때론 참여 마을을 통째 소각하는 무자비함도 보였다. 목숨을 부지하자면 고향을 등지고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만주 유랑에 나서고 의병에 참여하는 후손들도 부지기수. 이도저도 못한 후손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현대사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철저히 유린돼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껏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에 묶여 핍박과 수난의 세월을 살아왔다. 쌓이고 쌓인 한을 끝내 추스르지 못하면 그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1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부와 국민은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인색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대상황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적의 난, 동학 비도의 난, 동학변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이름과 모양이 각기 다르다. 같은 이념과 목적을 가진 하나의 농민혁명이 이리도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나, 때론 의문이 든다. 정치적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익명과 오명의 수모를 안긴 것은 지역과 세대의 장난이었을까.
근현대사의 기점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학농민의 정신과 실체를 파악, 희생자 한분 한분을 모두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찬란한 미래가 열린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산 자들은 그들의 정신에 경건한 예를 표해야 한다.
중국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있고, 일본에는 자유민권운동 기념관이 있다. 독일은 유대학살 위령관을 운영하고, 멕시코는 농민혁명 기념관 등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업을 통해 과거를 반추한다. 현실적 모순을 투영, 극복하고 자기 성찰을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거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동학농민 후손들 비참한 삶 … 참여자들 명예회복 시급
특별법 공포에 따라 2004년 9월 정부는 국무총리실 소속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유족 등록 및 결정, 명예회복, 기념사업 등 3개 분과로 구성, 운영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들은 동학의 흔적을 찾기 위해 호남과 영남, 충청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과정을 통해 짐작으로만, 그리고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동학 주역과 그들의 비극적인 삶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절손되어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도 아직 유족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 경북 성주 및 구미 지역을 중심으로 구전돼오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할아버지 박성빈 옹의 동학 접주 활동을 간접 확인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하순봉 전 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장관, 대학총장들도 동학농민군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족 신청 건수는 아직 미미하다. 2005년 5월 현재 신청 건수는 40여건에 불과하다. 정부는 올해 사업비로 3억6000만원을 배정, 위원들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동학농민의 후손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교도 진압작전을 펴면서 잔혹한 학살과 재산몰수라는 극단적 처분을 자행했다. 때론 참여 마을을 통째 소각하는 무자비함도 보였다. 목숨을 부지하자면 고향을 등지고 성과 이름을 바꿔야 했다. 만주 유랑에 나서고 의병에 참여하는 후손들도 부지기수. 이도저도 못한 후손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근현대사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철저히 유린돼 숨어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껏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은 보이지 않는 연좌제에 묶여 핍박과 수난의 세월을 살아왔다. 쌓이고 쌓인 한을 끝내 추스르지 못하면 그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1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정부와 국민은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 인색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대상황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적의 난, 동학 비도의 난, 동학변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등 이름과 모양이 각기 다르다. 같은 이념과 목적을 가진 하나의 농민혁명이 이리도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나, 때론 의문이 든다. 정치적 목적이 진실을 감추고 익명과 오명의 수모를 안긴 것은 지역과 세대의 장난이었을까.
근현대사의 기점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동학농민의 정신과 실체를 파악, 희생자 한분 한분을 모두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야 한다. 그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찬란한 미래가 열린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산 자들은 그들의 정신에 경건한 예를 표해야 한다.
중국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있고, 일본에는 자유민권운동 기념관이 있다. 독일은 유대학살 위령관을 운영하고, 멕시코는 농민혁명 기념관 등을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업을 통해 과거를 반추한다. 현실적 모순을 투영, 극복하고 자기 성찰을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거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