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의 정취가 남아 있는 문경새재 고갯길.
아침에 비. 늦게는 흐렸다. 조령을 넘어 문경에 당도하였다.
경북 문경시는 ‘옛길’의 도시다. 아니, 옛길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비해 옛길의 존재감이 크다. 이는 옛길 유적이 많은 탓도 있지만, 그것을 문화재로 살리려는 시 당국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경에는 전국에서 하나뿐인 ‘옛길박물관’이 있다. 문경새재 밑에 자리잡은 이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문경시립 새재박물관’. 새재 주변의 유물들이 전시 대상이지만, 전시물의 절반은 옛길과 이에 관련된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 같은 ‘옛길쟁이’에게는 꿈같은 볼거리들이다. 학예연구원에 따르면, 조만간 전면 개수해서 아예 ‘길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이런 곳을 경영할 수 있다면, 아니 이런 곳에서 일할 수만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전국 유일 ‘옛길박물관’ 사람들 반겨
박물관 말고도 문경시는 최근 수년간 옛길에 관련된 문화재 복원에 엄청난 관심과 힘을 쏟고 어마어마한 예산을 세워왔다. 6년 전 내가 처음으로 문경 시내 영남대로를 조사했을 때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고, 내 책을 통해서 개탄하기까지 했던 불쌍한 옛길 유적들이─물론 내 책 때문은 아니겠지만─지금은 몰라보게 단장되고 있다. 물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적도 많지만, 산간벽지 지자체 예산과 국가 보조금만으로 충당하고 있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앞으로 몇 년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강한 의지로 해마다 조금씩 추진해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마음이 놓인다.
옛길이란 전국 모든 시·군에 있던 역사 유적인데, 이에 대한 보존·복원 활동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벌이는 지자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통신사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는 상태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시대 문경은 농토가 별로 없는 산촌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평지가 있는 산양면 일대도 당시엔 문경 땅이 아니라 상주목의 월경지였다. 주민들은 쌀을 먹을 여건이 안 되어, 6·25전쟁 뒤까지도 도토리묵이나 조를 주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도토리묵밥이 지금은 문경시의 민속음식으로 지정돼 백반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있으니, 시대의 흐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탄광이 개발되고 문경선(당시는 점촌-가은 간, 해방 후는 진남-문경 간 연장) 기찻길이 생기면서, 문경은 ‘석탄의 도시’로 변모했다. 탄질은 태백보다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탄광이 대부분 북한에 있던 상황에서 문경 석탄은 남한의 산업화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나그네들의 숙소였던 조령 동화원 터(위),새재 마루턱에 있는 문경의 관문인 조령관문.
진짜 옛 오솔길은 ‘장원급제길’
문경새재, 즉 조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영남지방을 가는 데 중요한 관문이었다. 동쪽의 죽령이나 서쪽의 추풍령보다 험하지만 가장 짧은 경로였기 때문이다. 문경을 지나면 길은 경상도 각지로 갈라진다. 경상도 어느 고을을 가든 문경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교통 요지였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때 새로 개척된 경로다. 그 전에는 안보역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계립령(하늘재)이 있었다. 그리고 괴산 연풍 방면에서는 이화령(지금의 3번 국도)이 나란히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러나 넘는 고개는 달라도 이들이 모두 향하는 곳은 문경읍이었다.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이 지역은 6·25전쟁 때도 격전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 관광지가 돼 있는 ‘문경새재길’은 전쟁 때 전차가 지나갈 수 있게 새로 닦인 것이고, 진짜 옛길인 오솔길은 군데군데 단절되면서 ‘장원급제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채 남아 있다. 그 길은 탱크는 고사하고 수레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다. 이에 대해 통신사 조엄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갯길이 질어 거의 사람의 무릎이 빠지므로, 간신히 고개를 넘어 문경에 도착했다. 거듭 고갯길을 찾아 다시 영남 백성들을 대하고 보니, 세 해 만의 물색이 눈에 의의(依依)한데, 다만 한 가지 혜택도 도민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조령에서 시 두 수를 지었다.
새재의 충청도 쪽은 별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냥 시멘트길이다. 길이 그다지 길지 않을 뿐더러 주변에 연계할 만한 관광지도 없어 내버려두고 있는 듯하다. 반면 경상도 쪽은 주변이 ‘새재도립공원’에 지정되어 있어 시원한 계곡과 함께 분위기가 좋다. 옛날 나그네 숙소이던 원터·주막터 등도 복원됐고, 백두대간과 마주치는 고갯마루, 즉 충북에서 경북으로 넘어가는 지점에는 성벽과 관문도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제3관문이다. ‘3’이라는 숫자가 예고하듯 문경읍 쪽으로 내려가면 차례로 제2관문과 제1관문이 나온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보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조선시대 수도는 서울이고, 그렇다면 서울에서부터 차례대로 1, 2, 3관문 번호를 매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관문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이 관문을 세운 이유는 서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방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 상대는 일본이었다. 일본군이 남쪽에서 쳐들어온다고 가정하면 이 순서가 맞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맞은 신립 장군은 이곳에서 성을 지키지 않고, 넓은 충북 충주 중원평야, 탄금대 근처까지 적을 끌어들인 다음 전투를 벌였다. 평지전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옛길 연구의 성지인 새재박물관 전경(위),문경새재 곳곳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새재를 넘으며 지은 시 20편이 담긴 시비들이 서 있다.
세 사신이 동헌에 모여 활 쏘는 것을 보며 이야기했는데, 본관 송준명, 상주목사 김성휴, 김천찰방 이종영, 유곡찰방 최창국, 안기찰방 김제공이 보러 왔다.
이날은 50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