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동과 아프리카 일대에는 메뚜기 떼가 극성이라고 한다. 11월 말에는 아프리카를 휩쓴 분홍빛 메뚜기 떼가 유럽 스페인에까지 건너가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곡식의 3분의 1이 메뚜기에 의해 사라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심지어 아라파트가 쿠웨이트에서 무장단체를 조직한 1959년 심한 메뚜기 피해가 있었는데, 하필 그가 죽은 올해 45년 만에 다시 심각한 메뚜기 피해가 몰아쳐 “아라파트는 메뚜기 대장이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가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자 적잖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번 메뚜기 떼 습격을 ‘애굽의 10대 재앙’에 비유하며 불길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성서에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여덟 번째가 메뚜기였다.
우리 역사서에도 메뚜기 피해 기록이 여러 번 발견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제5대 임금 파사(婆娑)왕 30년(109년)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무려 24회의 기록이 전해오고, 고구려 8회 백제는 4회가 기록됐다. 고려 때는 메뚜기 피해가 모두 27회 기록돼 있다. 필자가 30여년 전 조사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중종 때까지 100여년 동안 62회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연 이상현상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메뚜기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아주 컸던 메뚜기 피해가 왜 유독 한국에는 적었을까. 더구나 옛날에는 메뚜기 떼가 한반도를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호기심은 끝없이 이어진다. 혹시 그 사이 이 나라의 기후 조건이 달라졌던 것은 아닐까(혹자는 이를 근거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록 가운데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엿보인다. 성종 7년(1476년), 왕가 사람들이 수시로 보고 참고하라는 뜻에서 ‘훌륭한 임금’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 나빠진 군주’, 그리고 ‘훌륭한 왕비’ 등을 주제로 해 시를 짓고 글을 써서 병풍 3개를 만들었다. 첫 번째 병풍인 ‘훌륭한 임금’에 나온 10명 가운데 마지막 군주는 당 태종(太宗·재위 626~649))이었다. 그를 칭송하는 대목에서는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자 그는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하는데, 네가 곡식을 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파먹어라”고 외치며 황충(蝗蟲·메뚜기)을 삼켰다고 기록돼 있다. 또 임읍(林邑)에서는 오색(五色)의 앵무새를, 신라(新羅)에서는 미녀 2명을 바치자 태종은 “앵무새도 괴롭고 추운 것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친척을 멀리 두고 떠나온 두 미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며 앵무새와 미녀를 각각 사신을 따라 돌아가게 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의 두 번째 임금 태종은 우리나라에도 나라의 기틀을 놓은 훌륭한 군주로 알려져 있고, 그가 만들었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치학 교재처럼 읽혔다. 그런 그가 메뚜기를 날로 삼켜 백성을 위하겠다고 외쳤는데, 어찌 후대의 지도자들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이 병풍이 지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가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자 적잖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번 메뚜기 떼 습격을 ‘애굽의 10대 재앙’에 비유하며 불길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성서에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여덟 번째가 메뚜기였다.
우리 역사서에도 메뚜기 피해 기록이 여러 번 발견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제5대 임금 파사(婆娑)왕 30년(109년)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무려 24회의 기록이 전해오고, 고구려 8회 백제는 4회가 기록됐다. 고려 때는 메뚜기 피해가 모두 27회 기록돼 있다. 필자가 30여년 전 조사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중종 때까지 100여년 동안 62회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연 이상현상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메뚜기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아주 컸던 메뚜기 피해가 왜 유독 한국에는 적었을까. 더구나 옛날에는 메뚜기 떼가 한반도를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줄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호기심은 끝없이 이어진다. 혹시 그 사이 이 나라의 기후 조건이 달라졌던 것은 아닐까(혹자는 이를 근거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록 가운데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엿보인다. 성종 7년(1476년), 왕가 사람들이 수시로 보고 참고하라는 뜻에서 ‘훌륭한 임금’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 나빠진 군주’, 그리고 ‘훌륭한 왕비’ 등을 주제로 해 시를 짓고 글을 써서 병풍 3개를 만들었다. 첫 번째 병풍인 ‘훌륭한 임금’에 나온 10명 가운데 마지막 군주는 당 태종(太宗·재위 626~649))이었다. 그를 칭송하는 대목에서는 메뚜기 떼가 들이닥치자 그는 “백성은 곡식을 생명으로 하는데, 네가 곡식을 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장(肺腸)을 파먹어라”고 외치며 황충(蝗蟲·메뚜기)을 삼켰다고 기록돼 있다. 또 임읍(林邑)에서는 오색(五色)의 앵무새를, 신라(新羅)에서는 미녀 2명을 바치자 태종은 “앵무새도 괴롭고 추운 것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친척을 멀리 두고 떠나온 두 미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며 앵무새와 미녀를 각각 사신을 따라 돌아가게 했다고 전한다.
당나라의 두 번째 임금 태종은 우리나라에도 나라의 기틀을 놓은 훌륭한 군주로 알려져 있고, 그가 만들었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정치학 교재처럼 읽혔다. 그런 그가 메뚜기를 날로 삼켜 백성을 위하겠다고 외쳤는데, 어찌 후대의 지도자들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이 병풍이 지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