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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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의 슬픔, ‘보수’를 열다

진보·보수 이념 떠나 인도적 지원 한목소리 … 북핵 등으로 경색된 남북관계 개선에도 호기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5-06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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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천의 슬픔, ‘보수’를 열다

    5월1일 오후 지하철 2호선 잠실역 지하광장에서 탈북예술인단이 용천 피해주민을 돕기 위해 공연을 열었다. 탈북예술인단은 보수단체인 자유총연맹이 후원하는 공연단이다. 4월28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대한YWCA 연합회 주최 ‘북한 용천 열차 폭발사고 구호 모금 캠페인’에 고사리 손들의 온정이 이어지고 있다. 탈북예술인단 공연에서 모금하고 있는 자유총연맹 회원들. (왼쪽부터)

    북한 용천 열차 폭발사고를 계기로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사회의 시각이 크게 바뀌고 있다. 그동안 북한돕기운동에 적극 나섰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 민간 지원단체들뿐 아니라 북에 적대적인 자세를 취해온 보수단체들도 지원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하나의 마음으로 어려움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고 있는 것.

    이런 변화는 단순히 용천 폭발사고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배태돼온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로 하나 된 마음, 대통령선거 과정에서의 열기, 탄핵반대 촛불집회와 ‘4·15’총선 정국에서 분출된 진보정당의 힘 등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총선과 북한의 열차사고를 계기로 양쪽 사회의 수구세력이 퇴조할 것이라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보수진영, “조건 없이 돕는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이하 향군)는 단체 설립 이후 처음으로 대북 지원에 나섰다. 4월27일 향군은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용천 폭발사고와 관련, 피해주민을 돕는 데 적극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향군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 있는 북한 동포들이 엄청난 참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을 돕기로 결정했다”며 “재향군인회 국내외 조직과 모든 회원들을 동참시켜 구호품과 성금 등을 모집해 온정의 대열에 앞장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향군은 환자들의 조기 회복을 위해 향군 산하기업체에서 제조하고 있는 꼬리곰탕 6000명분(1000통)을 대한적십자사에 기탁했다.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는 전국 62개 교단과 기관단체, 해외교회 등에 공문을 보내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1차로 모금한 5000만원으로 털 담요와 의약품, 비상식량 등 구호품을 마련해 4월28일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관계자에게 전달했으며 ‘북한 인민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의 위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조귀연 한기총 선교국 부장은 “북한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보수적이지만 사랑의 쌀 지원 등 북녘 동포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왔다”고 말했다.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유총련)도 50만 회원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1차로 4500만원 상당의 물품을 북측에 전달했다. 또 5월1일 오후 서울 잠실역 지하광장에서 자유총련이 후원하는 탈북예술인의 공연을 통해 거리 모금운동을 벌여 눈길을 끌었다. 장수근 자유총련 홍보매체본부장은 “북한 정권과 주민은 따로 떼놓고 봐야 한다”며 “자유총련은 그동안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제한 없이 나서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북한돕기운동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특히 시민회의는 탈북자동지회, 백두한라회,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과 함께 북한돕기운동을 벌이고 있다. 조중근 시민회의 사무처장은 “일각에선 북한과 완전한 주고받기를 요구하며 더 이상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번처럼 참혹한 사태 앞에선 그런 말조차 끄집어내기가 조심스럽다”며 “동포애를 발휘해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활발하게 모금운동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도 4월26일 오전 긴급회의를 열어 사상 처음으로 북한동포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이밖에도 바른선택국민행동 등 수많은 보수단체들이 한마음으로 모금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들 단체 가운데 구호품이 북한 주민에게 직접 전달되는지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도 여전히 있긴 하다. 신혜식 인터넷 독립신문 대표는 “우리는 계속 지원하고 화해협력을 유도하는데 북한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며 “우리의 지원이 북한 주민의 고통을 연장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인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북한 당국이 사고 직후 이례적으로 사고 발생 사실과 원인 등을 신속하게 발표했지만 이후 남측 구호물자의 육로 운송을 거부하고 수송시간이 훨씬 더 긴 해상수송을 고집해 아직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또 의료진과 병원선 등의 지원도 거부해 북한이 여전히 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방을 꺼리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보수진영은 인도적 지원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놀라운 것은 사실 대부분의 보수단체가 북한 주민 지원이 군사용 등으로 전용되는 것을 경계해왔던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 1990년대 중반 북한 주민이 자연재해 등으로 기아에 시달릴 때 남측 보수진영은 북한 체제 비난에 열을 올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도적 대북지원도 ‘퍼주기’라는 공세를 폈던 것에 비하면 분명 격세지감이 있다.

    물론 이런 변화를 보수진영이 북한 정권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아직 이른 감이 있다. 조중근 시민회의 사무처장은 “기본적으로 북한 체제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아니다”며 “이런 때일수록 북한의 핵과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더욱더 활발히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천의 슬픔, ‘보수’를 열다

    4월30일 구호물품을 실은 화물기가 사상 처음으로 직항로를 통해 평양공항에 들어갔다.

    용천 사고 지원 열기는 하나의 열풍처럼 전국을 휩쓸고 있다. 동아일보사가 4월24일부터 ‘북녘동포돕기운동’을 벌이고 있는 등 수많은 언론사, 진보적 사회단체, 대북지원단체들이 지원활동에 나서고 있다.

    성금 모금과 관련, 행정자치부에 허가를 받은 대한적십자사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 40여개 민간단체들이 모인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 피해동포돕기 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 등이 대대적인 모금활동에 나섰다. 또 ‘남북경협살리기 국민운동본부’ 등 국내 4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용천동포돕기 범국민운동본부’도 4월30일 출범식을 열고 북한 돕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반미여성회, 전국여성노동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36개 여성·시민단체들도 4월29일 서울 종로 YMCA 앞에서 ‘용천 돕기 여성행동 발대식 및 거리모금 캠페인’을 펼쳤다. 용천돕기여성행동은 “피해자 중에는 어린이들이 많아서 마치 우리 딸, 아들들이 병상에서 신음하는 것 같아 어머니 된 마음에 절로 눈물이 솟구친다”며 “북녘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 여야를 막론하고 북한 돕기에 발벗고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심정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할 것이다”고 밝혔다. 용천 돕기운동은 전국 자치단체 등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는 시 본청 및 25개 자치구 전 공무원이 3억5000여만원을 모금, 대한적십자사에 전달할 예정이고 ‘하이서울페스티벌’ 기간(5월1~9일)에 서울광장 등 30여 곳에 모금함을 설치해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고 있다. 부산시도 4월27일 ‘남북교류지원 범시민협의회’를 개최하고 의약품 생필품 등 10만 달러 상당의 구호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하기로 했다.

    폭발사고 8일째인 4월29일에는 국내 민간단체 연합체가 수집한 구호물품이 북한에 처음으로 전달됐다. 이날 운동본부는 중국 단둥 현지에서 구입한 2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생필품을 압록강 철로를 통해 사고 지역에 들여보냈다. 국내 민간단체들의 북한 구호 연합체가 물자를 대규모로 북한으로 들여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운동본부 측은 4월30일 오전 중에도 100억원 상당의 의약품 및 구호품을 추가로 북한에 공급했다. 또 이날 오전에는 구호품 100t을 실은 화물기가 사상 처음으로 직항로를 통해 평양에 들어가는 일도 일어났다.

    온정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면서 수년 전부터 대북 민간지원 활동을 펴온 운동단체들은 새로운 감회에 젖어 있다. 홍상영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부국장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적인 대북지원조차 북한 체제를 돕는 일이라는 비판이 많았다”며 “언론과 국민의 엄청난 호응을 보면서 이제는 민족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홍부국장은 또 “용천을 민족화해 협력의 상징적 구심점으로 삼아서 재건활동을 펴나갈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남북관계 어떻게 될까

    민간뿐 아니라 정부도 지원에 적극 나섰다. 정부는 4월29일 오전 고건 대통령권한대행 주재로 정책조정회의를 열어 북한이 요청해온 13개 품목의 구호자재와 장비(약 234억원)를 2주 내로 북한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현재까지 중국 등 외국 정부가 330만 달러, 국제기구 270만 달러 등 모두 600만 달러를 북한에 지원했다”며 “우리 정부는 북측이 요청한 자재, 장비를 포함해 2500만 달러의 물자를 북한에 보낼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북측이 제시한 구호 회담을 받아들여 4월27일 개성에서 마주 앉았다. 1984년 서울 수해 지원 의제를 놓고 남·북한이 구호 회담을 연 지 20년 만이었다. 북측이 대형사고를 재빨리 공개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북핵문제 등으로 경색한 남북관계를 극적으로 개선할 호기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초기 우리 정부의 대응이 좀더 적극적이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고 발생 하루 뒤인 4월23일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은 인도적 지원대책 마련을 지시하는 등 발빠른 대응을 하긴 했지만 외교의 기본이랄 수 있는 위로전문도 보내지 않았다. 탄핵으로 인한 국정공백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나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로전문을 보내 북측이 이를 공개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 전문가는 “북측이 구호품 육로 운송과 병원선 지원을 거부했을 때 북방한계선(NLL)에 배를 대고 문을 열라고 요구했더라면 아마도 북측과 국제사회를 모두 감동시켰을 것”이라며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했다고 아쉬워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용천 사고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한목소리로 단합하고 있는 이때가 남북관계에서 주변 강국에게 빼앗겼던 주도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다”며 “남북교류 협력을 북핵과 연계하지 말고 더욱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한 내부에서는 ‘4·15’총선을 거치며 진보정당이 약진하고 수구세력이 퇴조하는 흐름이 분명해졌다. 총선 과정에서 탄핵찬성 집회의 색깔론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으며, 보수정당을 표방해온 한나라당 내 대북강경파의 정치적 입지도 약화됐다.

    전문가들은 북한 지도부도 이번 폭발사고를 계기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백학순 실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는 등 북핵문제 해결과 경제 회생을 위해 뭔가 전향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며 “이런 흐름 가운데 발생한 용천 사고는 장기적으로 북한 지도부로 하여금 북핵 해결과 개혁개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남북 모두 탈냉전의 비전을 가진 세력이 강력하지 않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의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전망된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남한의 경우 총선 뒤 전체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정당 체질 자체는 겨울잠을 자고 난 곰처럼 몸집만 크고 힘이 없으며 북한도 대비책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며 “중요한 것은 남한사회 내부가 소모적인 대립을 끝내고 체제 개혁에 박차를 가해 변화를 선도한다면 북쪽이 스스로 안겨올 수 있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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