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일 오후 독자들이 교보문고의 실용서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강추! 2004년엔 나도 몸짱!’
‘나를 위한 최고의 투자는 여행이다’
‘자기계발서 사은잔치’.
서점에서 독자의 주목을 끌기 위해 판매대에 마련한 실용서의 홍보용 POP(Point of Purchase) 문구가 자극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확산되기 시작한 실용서 시장은 이제 독서시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건강 취미 자기계발 등 전통적인 실용서뿐 아니라 이제는 인문·사회과학·예술까지도 실용서화하고 있어 흥미롭다.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집계순위에는 실용서가 상위 순번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월 둘째 주 교보문고 종합순위를 보면 ‘선물’(1위)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2) ‘BIG FAT CAT의 세계에서 제일 간단한 영어책’(3) ‘설득의 심리학’(4)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5)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7) ‘메모의 기술’(9) 등 활용도가 높은 실용서가 포진해 있고, 그 뒤를 잇고 있는 책이 ‘파페포포 메모리즈’(6) ‘화’(8) ‘그 남자 그 여자’(10) 등 에세이류다. 이런 흐름은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등 대형서점이나 YES24 알라딘 등 인터넷 서점에서도 마찬가지.
실용서는 도서분류 기준상의 개념이 아니다. 일본 이와나미서적에서 내는 ‘액티브 신서’의 표어처럼 ‘읽고 바로 하자’는 취지에 어울리는 책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즘 나타나고 있는 실용서의 중요한 흐름은 세분화와 다양화다.
요즘의 베스트셀러는 백과사전처럼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여행서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3’(이두영, 중앙M&B),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메모의 습관을 강조하는 ‘메모의 기술’(사카토 켄지, 해바라기), 아침시간 활용법을 소개하고 있는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한스미디어) 등처럼 한 가지 주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모든 분야 책 실용화의 길 한창
이는 요리나 건강 분야 등도 마찬가지. 대개의 요리책에서 사용하는 계량형 스푼 대신 밥숟가락과 종이컵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김용환, 영진닷컴), ‘궁합이 맞는 과일·야채 생주스’(마루모 유키코, 아카데미북), ‘이탈리아 가정요리’(박주희, 동아일보사), ‘반신욕’(김소림, 학영사), ‘복근운동 30분’(커트 브룬가르트, 넥서스), ‘아름다운 몸의 혁명 스트레칭 30분’(밥 앤더슨, 넥서스) 등도 지나칠 만큼 좁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종류도 무척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이제까지 취미나 건강 어학 자기계발 등이 실용서의 주요 분야였다면 이제는 모든 분야의 책들이 실용화의 길을 걷고 있다. ‘궁궐의 우리나무’(박상진, 눌와)는 나무의 생태학에 대한 도서이면서 여행, 나무의 정보 등을 알 수 있는 활용도가 높은 실용서로 분류될 수 있다.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21세기북스)은 사회심리학적 기본 내용을 바탕으로 자기계발서로 확대된 경우다. ‘유혹의 기술’(로버트 그린, 이마고)은 유혹에 능했던 역사 인물들을 분류하고 유혹의 전략과 전술을 덧붙여 역사서와 자기계발서가 결합한 유형에 속한다.
일과 놀이가 결합하고, 딱딱한 방법서에 감성이 개입되는 것도 흔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학습과 만화의 결합이다. 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그리스로마신화’(가나출판사)나 과학상식을 만화에 담은 ‘살아남기’ 시리즈(아이세움), 한자를 이미지로 학습하게 하는 ‘마법 천자문’(시리얼, 아울북), 산부인과 의사 안명옥씨와 만화가 황미나씨가 함께 지은 10대 소녀들을 위한 성교육서 ‘루나레나의 비밀편지’(동아일보사)는 쉽고 흥미로운 글, 그림 등으로 인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영사 고세규 편집실장은 “조만간 오락성과 감동 위주의 문학작품에서도 밥벌이를 위한 정보 등 실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책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도 특징이다. ‘죽기 전에 꼭…’이나 ‘칭찬은 고래도…’처럼 주관성이 강한 책들이 잘 나간다. 무언가 설명해야 할 것이 있으면 마치 선배가 후배에게 얘기하듯 친절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든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거기다 보편적 상식을 약간 뛰어넘는 역발상을 가미하고, 정성 들인 편집을 통해 독자를 사로잡는다.
경제·경영 처세서도 이전에는 삶의 목표와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게 했지만 이제는 구체적 목표를 정해서 그 방법까지 제공하고 있다. ‘32세에 32평 만들기’(노용환, 국일증권경제연구소) ‘총각네 야채가게’(김영한, 거름)가 대표적.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영상매체에 익숙한 독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집중형(narrow focus) 정보, 감각적인 사진, 와이드형 편집, 주관적인 문체, 선명한 컨셉트, 경쟁력 있는 가격 등으로 무장된 책이 거대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망 아이템 찾기 치열한 정보전
출판사의 변화도 눈에 띈다. ‘설득의 심리학’ ‘칭찬은 고래도…’ 등의 실용서 베스트셀러를 펴내 지난해 직원들에게 700%의 상여금을 준 21세기북스는 최근 실용서 시장의 확대에 대비해 이제까지 없었던 새 팀을 가동시켰다. 이부연 팀장은 “우리도 주제를 좁혀서 세분화하고, 저자가 독자에게 친절하게 이야기하는 식의 책들을 기획하고 있다”며 “경제가 힘들어서 그런지 독자들이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을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어학과 건강 등의 실용서 분야에서 많은 베스트셀러를 내온 넥서스도 고품질 실용서를 내놓기 위해 묘안을 짜내고 있다. ‘행복을 지키는 과학 수지침 30분’(곽순애), ‘발마사지 30분’(김수자) 등의 책은 알찬 내용에 시원한 사진과 컬러인쇄 등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 침체돼 있던 관련 분야를 살려내기도 했다. 김인숙 실용팀 부장은 “출판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실용서가 아주 세분화돼 있고 품질도 좋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이다”며 “세계 각국에서 자연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이 부상하고 있는 만큼 동양주의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분야의 실용서들이 꾸준히 인기를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실용서 분야의 경쟁은 정보전으로까지 번져 기획자들은 인터넷 신문 방송 잡지에 늘 귀를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일부 출판사는 해외에 통신원까지 두고 정보를 얻고 있다. 인문 문학 관련 서적 전문 출판사들도 인문서의 주관화, 영역 파괴 혹은 가로지르기 등을 통해 실용서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교보문고 홍보팀 홍석용씨는 “IMF 이후 실용서 시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다양화되는 추세다”며 “독자들의 요구에 따른 변화인 만큼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용서는 전체 출판시장의 규모를 키웠고, 자신의 삶을 좀더 풍부하게 하려는 이들에게 일정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위기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을 길러준 게 사실이지만 그 반대급부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출판평론가 이권우씨는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고 실용서에서 주장하듯 개인이 노력해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는 회의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모두가 실용서를 읽고 그렇게 바뀌면 이미 경쟁력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더욱이 실용서가 몰고 오는 유행들, 예컨대 아침형 인간이니 웰빙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를 획일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실용서 시장의 분위기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한기호 소장은 “정치는 희망을 잃고, 경제는 불안해 개인들의 위기의식이 깊어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좀더 친절하고 감성적이면서, 개인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맞춤형 책들이 당분간 계속 관심을 끌 것이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