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차실(茶室)에 툇마루를 놓았다. 널빤지는 불이 난 고가에서 타다 남은 대청마루 조각을 얻어와 사용했다. 그러니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고가의 대청마루 널빤지가 내 차실의 툇마루로 환생한 셈이다. 방에서 문밖의 산중을 바라보는 것과 툇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방은 밖과 단절된 공간이지만 툇마루는 산중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툇마루란 방과 산중 사이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산중의 풍경이 더 가깝게 보인다.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나 개울을 흘러가는 물소리도 좀더 또렷하게 들린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널빤지의 감촉도 너무 좋다. 그래서 마당을 오다가다 공연히 앉곤 한다. 묵은 널빤지여서 새것과 어딘지 다르다. 무정(無情)의 물건이라 하지만 관록과 연륜이 느껴진다.
처소를 찾아온 손님들은 대부분 나에게 왜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고 묻는다. 툇마루를 놓은 목수도 그런 질문을 해왔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들어왔노라고 말해준다.
방에 걸린 호미 내 마음의 밭 일구는 화두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깨어 있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서울 생활에서는 하루하루 순수하게 내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맑게 깨어 산 날이 얼마였는지 부끄럽다. 타의이거나 자의 반 타의반이 대부분이었다. 내 삶을 살면서도 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객이었던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쟁기질을 하면서 눈앞의 밭을 봐야지 뒤를 보면서 할 수는 없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 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가장 영롱하고 아름답다. 뒤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던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산중에 들어온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치열하게 개성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나는 나를 전부 드러내놓으며 살고 싶다. 지금 밖에는 매화꽃이 만개해 있다. 지난 겨울 한파가 몰아칠 때는 가지가 얼고 부러지더니 때가 되니 제 개성대로 꽃을 피우고 있다. 나도 매화가 그러하듯 누구도 닮지 않은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산다는 말이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 욕심은 저절로 줄어들게 된다. 내 처소에는 다섯 평 정도의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개구리와 피라미와 미꾸라지와 뱀이 산다. 나는 특히 개구리 식구들을 걱정했지만 뱀은 아주 소식주의자다. 결코 욕심 부리는 일이 없다. 산비둘기나 꿩도 마찬가지, 결코 콩밭을 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노자가 했던 말이던가. 식영(息影)이란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풀자면 ‘그림자가 쉰다’는 정도일 터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숲 속에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저잣거리를 떠나니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고 그림자도 쉬게 되니 좋다. 예전 인도의 상류 사회에서는 임간기(林間期)라는 것이 있었다. 자식을 다 키워놓고 늘그막에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스승 삼아 사는 기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은둔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늘 저잣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저잣거리에서 가슴 시린 소식이 들려오면 나도 마찬가지로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 처마 끝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때로 가슴이 답답해지면 나도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 산중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내 질서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힘들게 사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고구마 순이 다 얼어버렸다고 투덜대신다. 나와 함께 비닐을 씌우긴 했지만 방 윗목에서 싹을 틔운 고구마를 너무 일찍 밭으로 옮겨 심어 얼어 죽고 만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올 밭농사의 첫 실패작이다. 농부의 조언을 들으니 감자는 추위에 강하지만 고구마는 아주 약하다고 한다. 때를 살피지 않고 과욕을 부린 대가다. 겨울을 함께 보냈던 씨 고구마에게 아궁이 잉걸불에 구워 먹던 군고구마를 생각하니 더욱 미안하다.
나는 방에 호미를 걸어두었다. 농부들이 밭에 나가 일하는 동안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호미는 올 한 해 내 마음 밭을 일구는 화두가 될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물음을 던질 것이다.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툇마루에 앉아서 보면 산중의 풍경이 더 가깝게 보인다.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나 개울을 흘러가는 물소리도 좀더 또렷하게 들린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널빤지의 감촉도 너무 좋다. 그래서 마당을 오다가다 공연히 앉곤 한다. 묵은 널빤지여서 새것과 어딘지 다르다. 무정(無情)의 물건이라 하지만 관록과 연륜이 느껴진다.
처소를 찾아온 손님들은 대부분 나에게 왜 산중으로 내려와 사느냐고 묻는다. 툇마루를 놓은 목수도 그런 질문을 해왔다.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온전하게 살고 싶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들어왔노라고 말해준다.
방에 걸린 호미 내 마음의 밭 일구는 화두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정신으로 깨어 있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서울 생활에서는 하루하루 순수하게 내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맑게 깨어 산 날이 얼마였는지 부끄럽다. 타의이거나 자의 반 타의반이 대부분이었다. 내 삶을 살면서도 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객이었던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쟁기질을 하면서 눈앞의 밭을 봐야지 뒤를 보면서 할 수는 없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면 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이 가장 영롱하고 아름답다. 뒤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던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산중에 들어온 것이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치열하게 개성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나는 나를 전부 드러내놓으며 살고 싶다. 지금 밖에는 매화꽃이 만개해 있다. 지난 겨울 한파가 몰아칠 때는 가지가 얼고 부러지더니 때가 되니 제 개성대로 꽃을 피우고 있다. 나도 매화가 그러하듯 누구도 닮지 않은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다.
온전하게 산다는 것은 순리대로 산다는 말이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 욕심은 저절로 줄어들게 된다. 내 처소에는 다섯 평 정도의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개구리와 피라미와 미꾸라지와 뱀이 산다. 나는 특히 개구리 식구들을 걱정했지만 뱀은 아주 소식주의자다. 결코 욕심 부리는 일이 없다. 산비둘기나 꿩도 마찬가지, 결코 콩밭을 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노자가 했던 말이던가. 식영(息影)이란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풀자면 ‘그림자가 쉰다’는 정도일 터이다. 숲 속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숲 속에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저잣거리를 떠나니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고 그림자도 쉬게 되니 좋다. 예전 인도의 상류 사회에서는 임간기(林間期)라는 것이 있었다. 자식을 다 키워놓고 늘그막에 숲으로 들어가 자연을 스승 삼아 사는 기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내가 은둔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늘 저잣거리에 사는 사람들과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저잣거리에서 가슴 시린 소식이 들려오면 나도 마찬가지로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 처마 끝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때로 가슴이 답답해지면 나도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 산중에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내 질서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힘들게 사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고구마 순이 다 얼어버렸다고 투덜대신다. 나와 함께 비닐을 씌우긴 했지만 방 윗목에서 싹을 틔운 고구마를 너무 일찍 밭으로 옮겨 심어 얼어 죽고 만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올 밭농사의 첫 실패작이다. 농부의 조언을 들으니 감자는 추위에 강하지만 고구마는 아주 약하다고 한다. 때를 살피지 않고 과욕을 부린 대가다. 겨울을 함께 보냈던 씨 고구마에게 아궁이 잉걸불에 구워 먹던 군고구마를 생각하니 더욱 미안하다.
나는 방에 호미를 걸어두었다. 농부들이 밭에 나가 일하는 동안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호미는 올 한 해 내 마음 밭을 일구는 화두가 될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물음을 던질 것이다.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