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법칙이 있다. 선조들이 겪은 끔찍한 비극은 세월이 흐르면 후대에게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강제규 감독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 법칙을 증명하는 가장 최근의 예다.
물론 상품으로 만들기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다. 금기시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다루어져왔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영화에서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관객들의 정치적 태도나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어느 쪽이든, 이미 옛 영화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소재가 기형적으로 낡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소재에 대해 비교적 순수한 접근법을 시도한다. 동족의 살을 찢어대는 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영화는 지금까지 이 시대를 그린 다른 영화들과 달리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반쯤 포기한다. 대신 한국전쟁은 더욱 보편적인 전쟁이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진태(장동건 분)와 진석(원빈 분)이라는 형제다. 동생 진석의 대학 진학을 위해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던 진태는 엉겁결에 동생과 함께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간다. 동생을 군대에서 빼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뛰어들던 진태는 서서히 전쟁의 파괴성에 오염돼간다.
좋은 설정이고, 이 이야기에는 관객을 움직일 만한 진실성과 성실함이 녹아 있다. 문제가 있다면 영화가 여전히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지나치게 단순화한 신파의 정서를 남용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설정이 요구하는 것만큼 깊이 생각하는 대신, 비슷비슷한 짧은 생각을 비슷비슷한 장면들에 섞어 반복해 내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내용보다 스케일이다.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며 눈이 높아진 관객들에게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규모의 전쟁 장면을 쏟아낸다. 후반작업까지 100% 한국 인력과 기술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관객들에 대한 한국영화의 공공연한 도전이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영화가 벤치마킹을 했음이 분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잔상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이겠지만.
물론 상품으로 만들기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한국전쟁은 여전히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다. 금기시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이 다루어져왔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영화에서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하나의 도구였다. 관객들의 정치적 태도나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어느 쪽이든, 이미 옛 영화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소재가 기형적으로 낡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소재에 대해 비교적 순수한 접근법을 시도한다. 동족의 살을 찢어대는 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영화는 지금까지 이 시대를 그린 다른 영화들과 달리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반쯤 포기한다. 대신 한국전쟁은 더욱 보편적인 전쟁이 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진태(장동건 분)와 진석(원빈 분)이라는 형제다. 동생 진석의 대학 진학을 위해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던 진태는 엉겁결에 동생과 함께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간다. 동생을 군대에서 빼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뛰어들던 진태는 서서히 전쟁의 파괴성에 오염돼간다.
좋은 설정이고, 이 이야기에는 관객을 움직일 만한 진실성과 성실함이 녹아 있다. 문제가 있다면 영화가 여전히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지나치게 단순화한 신파의 정서를 남용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설정이 요구하는 것만큼 깊이 생각하는 대신, 비슷비슷한 짧은 생각을 비슷비슷한 장면들에 섞어 반복해 내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내용보다 스케일이다.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며 눈이 높아진 관객들에게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청난 규모의 전쟁 장면을 쏟아낸다. 후반작업까지 100% 한국 인력과 기술로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관객들에 대한 한국영화의 공공연한 도전이며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영화가 벤치마킹을 했음이 분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잔상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