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농축 우라늄으로 만든 원폭(위 왼쪽)과 플루토늄으로 만든 원폭. 고농축 우라늄을 만드는 데 쓰이는 원심분리기(아래).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2차 북핵 위기가 다시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북핵 위기는 럭비공과 같아서 언제 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럭비 선수들이 치밀한 작전으로 승리를 도모하듯, 북핵 위기도 자세히 관찰하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진다.
북한 실정상 원심분리기·전력 모두 불충분
원폭은 우라늄 광석을 농축해서 만드는 고농축 우라늄 원폭과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해서 얻은 플루토늄으로 만든 원폭 두 가지가 있다. 1차 북핵 위기는 플루토늄, 2차 북핵 위기는 고농축 우라늄에 의한 것이었다.
1차 북핵 위기는 1992년 5월4일 북한이 국제원자력위원회(IAEA)에 “사용후 핵연료에서 90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신고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에 IAEA는 북한이 제출한 신고서가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사찰에 들어갔는데, 북한이 두 군데 시설에 대해서는 사찰을 거부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93년 3월12일)함으로써 위기가 본격화됐다.
90g의 플루토늄으로는 핵무기를 만들 수 없다. 전문가들은 최소한 90% 이상의 순도로 7kg 이상의 플루토늄을 모아야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1차 북핵 위기 때 많은 학자들은 북한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순도’와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으나, 북한은 NCND(확인도 부인도 해주지 않는 것)로 일관했다. 그런데 최근 북한이 이 의문에 대해 반(半)쯤 대답을 해주었다. 1월6일부터 닷새간 미국 대표단의 방문을 허용한 북한이 일부 핵시설을 공개한 것.
이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지그프리드 헤커 전 로스알라모스 핵연구소 소장은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북측은 지난해 6월 8000개의 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며 우리에게 플루토늄을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는 “북측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과 순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북한은 1992년 이전과 2003년 이후 최소한 두 차례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그 양과 순도는 확인되지 않아 북한이 플루토늄 원폭을 보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를 남겨놓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 정부가 북한이 추출한 것으로 확인된 플루토늄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고농축 우라늄이다.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려면 원심분리기가 있어야 한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원심분리기의 원심력에 의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불순물이 떨어져나가 순도가 높아지는 농축이 일어나므로 원심분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속 회전이다.
자동차 계기판에는 분(分)당 엔진 회전수를 나타내는 rpm(revolutions per minute)판이 있다. 5단 기어를 넣고 전속으로 달릴 때 rpm 판은 대략 5000 정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라늄 농축에 쓰이는 원심분리기의 rpm은 7만을 넘겨야 한다. 한국 공군이 보유한 KF-16 전투기 엔진의 최고 rpm이 대략 1만3000 정도이다. 한국은 이 엔진을 독자 개발하지 못했으므로 원심분리기도 만들지 못한다.
문제는 북한인데 국가정보원 등 국내 정보기관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은 미그 전투기의 엔진을 전량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북한이 7만rpm을 기록하는 원심분리기를 제작하기 힘들 것이다”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최근 북한이 재처리한 것으로 확인된 사용후 핵연료.
파키스탄은 1990년대 초반 2000여대의 원심분리기를 제작해 60kg의 고농축 우라늄을 만들고, 1998년 5월 핵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1976년까지 네덜란드에서 공부한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이끄는 칸연구소가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고농축 우라늄 원폭 개발을 이끌었다.
지난해 12월19일 리비아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하며 미국과 영국 출신 조사관들로 구성된 IAEA의 사찰단을 받아들였다. 이 사찰에서 IAEA는 파키스탄에서 만든 것과 아주 유사한 원심분리기 설계도와 이 원심분리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공작기계와 부품을 상당량 발견했다. 그리고 리비아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한 공장에게 부품 제작을 의뢰한 것과 국제범죄 조직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도입한 것을 밝혀내고 “핵 관련 물질의 국제 암시장은 ‘월마트’ 수준”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美 정부 ‘북한 카드’ 땐 한국 인질 잡을 수도
이로써 2001년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친미로 선회한 파키스탄이 암거래 조직을 통해 핵 확산 주범으로 몰리게 됐다. 그러자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파키스탄 정부가 아니라 칸연구소가 주범”이라며 파키스탄 핵 개발의 아버지인 칸 박사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북한은 파키스탄이 가우리 미사일을 만들 때 기술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핵 기술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칸 박사와 무샤라프 대통령 간의 알력이 커지면 파키스탄과 북한 간의 핵 커넥션도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이런 기대로 ‘플루토늄이 있다’는 북한 주장에 대해서 전혀 대응하지 않고, 2002년 북한이 “있다”고 한 고농축 우라늄 계획에 관해 사찰을 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플루토늄을 놓고 미국과 협상할 것을 요구하는데, 미국은 ‘고농축 우라늄부터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엇박자’가 장차 한반도에 큰 폭풍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그 폭풍의 뇌관은 ‘PSI(확산방지구상)’가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PSI는 지난해 5월부터 미국 등 11개국이 논의한 것으로, 11개국은 WMD와 그 부품을 실은 항공기와 선박은 영해는 물론이고 공해상에서도 규제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미국 등 PSI 회원국이 공해상을 지나는 북한 선박을 세우고 WMD나 그 부품을 찾아내 압류한다면 북한은 이를 도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공해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PSI 국가를 공격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 한국을 대타로 삼을 수밖에 없다.
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은 북한을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고 영변 등을 제한 공습하는 ‘작계 5026’을 만들며 일전불사 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북측은 1994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남북회담이 열리자 박영수 대표 등을 통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등의 위협을 가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한국을 인질로 잡은 것인데 이 협박에 놀란 김영삼 정부가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제한 공습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회담을 지속함으로써 그해 10월 제네바 합의가 탄생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이와 비슷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며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 대통령을 코너로 몰아넣으면, 부시 대통령측은 북한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즉 부시 대통령이 PSI를 가동시켜 WMD를 실은 북한 배를 억류함으로써 역전을 모색하는 것인데 이때 북한은 한국을 인질로 잡는 전래의 방법을 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1월30일 노무현 대통령은 안보보좌관과 국방보좌관을 교체함으로써 2기 안보팀을 구성했다. 2기 안보팀은 올 여름쯤 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북한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를 묻는 난해한 질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