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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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명당에 묘 써도 자기 하기 나름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4-01-16 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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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 명당에 묘 써도 자기 하기 나름

    ‘차천자’의 무덤.‘차천자’ 어머니의 무덤은 풍수적으로 길지에 속한다.현재 남아 있는 보천교 교당(왼쪽부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정읍 지나 호남터널 조금 못 미치는 지점 오른쪽으로 입암산(立岩山)의 웅장한 모습이 보인다. 입암이란 정상의 바위가 마치 사람이 쓰는 갓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 바위(巨石) 숭배 문화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풍수에서도 이를 산천 정기의 응결과 발현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민속신앙과 마찬가지로 매우 귀하게 여긴다.

    정읍의 영산 내장산의 한 지맥인 입암산은 다시 방장산→ 비룡산→ 국사봉→ 두승산 →천태산을 거쳐 정읍 이평면의 전봉준 고택이 있는 곳까지 지맥이 이어진다.

    전봉준(1854~1894), 강증산(증산교 교주ㆍ1871~1909), 차경석(보천교 교주ㆍ1880~1936) 등이 모두 이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물들이다. 1960년대 신기(神氣)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최영단씨도 바로 입암산 자락에서 활동했다.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전봉준이 죽고, 1909년 민중종교로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던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도 죽자, 삶의 지향점을 잃은 많은 민중들은 증산교에서 독립한 차경석의 보천교로 몰려들었다. 보천교의 교세는 날로 커져 서울과 전국 각지에 조직망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교인 수가 적게는 100만명, 많게는 600만명까지 됐다는 말이 있을 만큼 당시 교세는 대단했다.

    1929년 정읍 대흥리(실제 행정명은 접지리)에 궁궐 규모의 거대한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교주가 장차 천자로 등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차경석은 ‘차천자(車天子)’로 불렸다고 한다. 그 이전에 이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직접 이곳을 찾아올 정도로 교세가 욱일승천했다. 이곳 주민 이용규씨(65)는 “그때 이미 풍수적으로 천하의 명당터에 보천교 본부를 잡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 비룡산→ 국사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산들의 모양을 五行으로 환원해보면 火山→土山→金山→水山→木山으로 상생관계가 이뤄져 지극히 좋은 터며, 운이 맞으면 남쪽으로 만리 북쪽으로 만리에 걸쳐 36개국의 조회를 받을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실제 풍수서에 이렇게 다섯 가지 모양의 산이 마치 구슬처럼 이어지는 지세를 오성연주격(五星連珠格)이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일본 총독이 찾아올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보천교는 차천자의 죽음과 함께 공중분해된다. 궁궐 같은 교당은 헐려 일부는 서울 조계사 대웅전 건물 짓는 데 쓰였고, 나머지는 내장사 대웅전, 내소사 종각에 쓰였다고 한다. 당시 교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이곳 대흥리에서 1km 떨어진 신구동에 차천자의 무덤과 그 어머니 무덤이 몇십미터 간격으로 있다. 차천자의 무덤은 초라한 반면, 그 어머니 무덤에는 웅장한 망주석과 상석이 놓여 있다. 차천자가 생존할 당시 잡은 어머니의 무덤 자리인 만큼 풍수적으로 격식을 갖춰 모셨기 때문이다. 풍수 초보자들에게 설명하기 좋은 모범 땅이다.

    이렇게 ‘오성연주격’이라는 최고의 터에 교당이 자리하고, 천자의 어머니를 좋은 땅에 모셨는데도 그렇게 갑자기 보천교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땅이란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이 발흥할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하여 원광대 유심근 교수(원광대 한방병원장)의 말을 새겨볼 만하다.

    “조선을 멸망하게 한 일본은 조선 국왕이라는 지향점을 잃은 조선 백성들에게 증산교나 보천교와 같은 것으로 그 지향점을 대체했다. 보천교 내부에 친일세력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일제가 일부러 조장한 경향이 없지 않다는 의미다. 보천교가 와해되자 일부 세력은 원불교로 편입된다. 원불교가 오늘날 가장 큰 민족종교가 된 것도 그 덕분이다.”

    보천교의 몰락은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지 못할 경우 천하의 명당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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