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43)이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오의원은 당내 소장개혁파 모임인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이하 미래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정풍운동’을 주도해온 대표적 개혁파였다. 오의원은 불출마선언을 하는 자리에서 “참으로 부끄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오의원을 만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산 4년’에 대한 이런저런 소회를 들어봤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서울 강남을 지역구에 출마, 국회의원이 됐다. 왜 정계에 입문할 생각을 했나.
“나는 환경운동연합의 초창기 멤버다. 오랜 기간 환경운동에 참여하면서 시민단체 10곳보다 국회의원 1명이 낫다는 것을 절감했다. 국회의원 한 번 만나 설득하기가 좀 힘든가. 또 이전부터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 의무감 내지 책임감, 현실적 필요성이 합쳐져 출마를 결심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었나.
“출마할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날 국회로 간 환경운동가로 봐달라’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한눈 안 팔고 환경문제 해결에 전념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정치개혁에 대한 욕심이었다. 솔직히 이런 호기심도 있었다. ‘저 동네(국회)는 어쩌면 저렇게 국민 마음과 동떨어진 행태만을 보일까.’ 누군가 먼저 나서서 합리적 대화를 시도한다면 뭔가 바뀌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물이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첫 순간은 언제였나.
“2000년 6월, 16대 국회 등원 직후 당에 ‘6ㆍ15’ 남북정상회담 관련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나도 그 일원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기존에 내가 남북관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지금은 한나라당의 ‘입지’가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 아니 수구라고 해도 좋을 발언들의 연속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상호주의’에 대한 탄력적 견해를 피력했다가 십자포화를 맞았다. 일종의 ‘길들이기’였다고 생각한다. 충격이 커 이후 그 회의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도 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했다.”
-일종의 우울증을 경험했을 수도 있겠다.
“그랬다. 극심한 상태에까지 갔다. ‘정치적 실어증’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2001년 6월 ‘미래연대’ 대표를 맡게 됐다. 덕분에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심하며 이를 악물 수 있었다.”
-국회의원 본연의 자세에서 멀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넘치는 특권이다. 너무 많은 기득권을 별 대가 없이 누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사고가 경직되고 고마운 줄을 모른다. 유럽 의원들은 자전거 타고 등원하며 일에 매달리느라 사무실 침낭에서 잠을 자곤 한다지 않나.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한다.”
-‘특권’에는 금전적인 것도 포함돼 있나.
“그렇다. 예를 들어 후원회 제도, 이거 폐지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후원회를 통해 모은 돈은 의정활동 외의 곳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폐지가 어렵다면 감사라도 철저히 해야 한다. 금전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특권들을 제거해버리면 신분상승을 위해 의원 자리를 노리는 일부 인사들 또한 함께 사라질 것이다. 국회의원은 봉사직이어야 하지 과시하고 누리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업무 그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나.
“이해집단 간 갈등 조정이 참 힘들다. 애초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도 진행하다 보면 결국 서로 이해가 다른 집단 간의 이전투구 및 그 조정에 빠져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변호사 겸 방송인으로서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다 국회의원이 됐다. ‘스타형 정치인’으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바닥 정치를 경험 못한 것이 핸디캡이 됐다. 보통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바닥 다지기’ ‘얼굴 알리기’를 하며 지역 일꾼으로 자리매김해 나가지 않나. 그런 분들과의 사고 괴리가 컸다. 일단 국회 업무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지역 이해 대변에 주력할 것이냐, 국정운영에 매진할 것이냐의 문제다. 게다가 나는 지역구가 서울 강남이라 ‘동네 일 신경 쓰지 말고 큰일에 힘쓰라’는 유권자들의 격려를 유난히 많이 받았다. 나로서는 큰 힘이 됐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욕도 많이 먹었을 것이다. 상처받은 적은 없었나.
“왜 없겠나. 특히 아이들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정계 입문 당시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 1학년이었다. 그런데 얘네들이 학교에서 교사한테서 ‘국회의원은 다 나쁜 놈’이라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듣고 와서는 ‘아빠 정치 그만 하면 안 되냐’며 매달리는 거다. 신문기사, 방송 뉴스는 물론이고…. 친척들 시선까지 곱지 않아지더라.”
-국회의원은 수많은 이권집단의 로비 표적이 되게 마련이다.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과 관련한 ‘접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나.
“의원이 되면서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다. 움직이면 돈인데 솔직히 (돈이) 많이 아쉬웠다. 2000년 첫 후원회를 열자 1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 나는 ‘평소 내가 이렇게 인덕이 많았나’ 하며 내심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순위로는 200등이 넘는 수준이더라(웃음). 그마저도 지인들보다는 이른바 ‘앞으로 거래 잘 해보자’는 식의 제스처가 많았다. 의심스러운 걸 다 돌려주고 나니 반도 남지 않았다. 그때 참 갈등이 되더라. 의원한테 돈은 ‘무기’나 다름없는데….”
-다른 의원들도 그렇게 들어오는 돈을 돌려주나.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많은 선배들이 ‘산하단체 돈 다 돌려주면 무엇으로 정치 하냐’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한 2년 하고 나니 나중에는 아예 후원금을 넣지 않더라.”
-국회의원 한 번 하고 나면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한다더라. ‘금단증상’을 이겨낼 자신이 있나.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은 몇 년이라도 생업에 종사한 적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달리 세운 뜻이 있어 정계에 입문했다가도 준비한 것이 다 떨어지고 나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인과 정치인을 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돌아갈 자신감’이 생기는 것 아닐까. 나 같은 경우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나마 자기 절제가 가능했던 것 같다.”
-오의원이야 변호사이니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늘 ‘언제든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인가.
“국회의원은 강해야 한다. 동료에게든 타 정당에든 관료들에게든 약하게 보였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런데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하나. 그런 말은 절대 못한다. 그러니 또 내 나름대로는 그 갈등으로 인한 속앓이가 얼마나 심했겠나.”
-이른바 ‘5, 6공 기여 인사 용퇴론’을 주장한 까닭에 최근에도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힘들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틀린 말 하나 없다’며 격려해주는 동료, 선·후배들이 많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견디기 힘든 폄하와 조롱이 이어지더라.”
-17대 총선을 통해 등장하게 될 정치 초년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처음부터 사익 추구를 목표로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처음에는 다 나름의 우국충정이 있을 것이다. 그 초심을 잘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언제 그만둬도 떳떳하게 제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되겠다는 결심으로 도전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치는 이것으로 끝이라면서 왜 인터뷰에는 응했나. 혹 다른 꿈이 있는가.
“그런 질문은 좀 그렇다. 이런 인터뷰 역시 내 나름의 사회 참여다. 내가 무슨 초야에 묻히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나. 외국에서 1년쯤 공부한 뒤 돌아와 환경전문변호사로 활동할 생각이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서울 강남을 지역구에 출마, 국회의원이 됐다. 왜 정계에 입문할 생각을 했나.
“나는 환경운동연합의 초창기 멤버다. 오랜 기간 환경운동에 참여하면서 시민단체 10곳보다 국회의원 1명이 낫다는 것을 절감했다. 국회의원 한 번 만나 설득하기가 좀 힘든가. 또 이전부터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런 의무감 내지 책임감, 현실적 필요성이 합쳐져 출마를 결심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었나.
“출마할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날 국회로 간 환경운동가로 봐달라’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한눈 안 팔고 환경문제 해결에 전념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정치개혁에 대한 욕심이었다. 솔직히 이런 호기심도 있었다. ‘저 동네(국회)는 어쩌면 저렇게 국민 마음과 동떨어진 행태만을 보일까.’ 누군가 먼저 나서서 합리적 대화를 시도한다면 뭔가 바뀌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물이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첫 순간은 언제였나.
“2000년 6월, 16대 국회 등원 직후 당에 ‘6ㆍ15’ 남북정상회담 관련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나도 그 일원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기존에 내가 남북관계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지금은 한나라당의 ‘입지’가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 아니 수구라고 해도 좋을 발언들의 연속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상호주의’에 대한 탄력적 견해를 피력했다가 십자포화를 맞았다. 일종의 ‘길들이기’였다고 생각한다. 충격이 커 이후 그 회의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도 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했다.”
-일종의 우울증을 경험했을 수도 있겠다.
“그랬다. 극심한 상태에까지 갔다. ‘정치적 실어증’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2001년 6월 ‘미래연대’ 대표를 맡게 됐다. 덕분에 ‘다시 시작해보자’고 결심하며 이를 악물 수 있었다.”
-국회의원 본연의 자세에서 멀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넘치는 특권이다. 너무 많은 기득권을 별 대가 없이 누리고 있다. 그렇다 보니 사고가 경직되고 고마운 줄을 모른다. 유럽 의원들은 자전거 타고 등원하며 일에 매달리느라 사무실 침낭에서 잠을 자곤 한다지 않나. 우리도 그렇게 돼야 한다.”
-‘특권’에는 금전적인 것도 포함돼 있나.
“그렇다. 예를 들어 후원회 제도, 이거 폐지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후원회를 통해 모은 돈은 의정활동 외의 곳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폐지가 어렵다면 감사라도 철저히 해야 한다. 금전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특권들을 제거해버리면 신분상승을 위해 의원 자리를 노리는 일부 인사들 또한 함께 사라질 것이다. 국회의원은 봉사직이어야 하지 과시하고 누리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업무 그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나.
“이해집단 간 갈등 조정이 참 힘들다. 애초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도 진행하다 보면 결국 서로 이해가 다른 집단 간의 이전투구 및 그 조정에 빠져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변호사 겸 방송인으로서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다 국회의원이 됐다. ‘스타형 정치인’으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바닥 정치를 경험 못한 것이 핸디캡이 됐다. 보통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바닥 다지기’ ‘얼굴 알리기’를 하며 지역 일꾼으로 자리매김해 나가지 않나. 그런 분들과의 사고 괴리가 컸다. 일단 국회 업무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지역 이해 대변에 주력할 것이냐, 국정운영에 매진할 것이냐의 문제다. 게다가 나는 지역구가 서울 강남이라 ‘동네 일 신경 쓰지 말고 큰일에 힘쓰라’는 유권자들의 격려를 유난히 많이 받았다. 나로서는 큰 힘이 됐다.”
-국회의원이 되면서 욕도 많이 먹었을 것이다. 상처받은 적은 없었나.
“왜 없겠나. 특히 아이들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정계 입문 당시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 1학년이었다. 그런데 얘네들이 학교에서 교사한테서 ‘국회의원은 다 나쁜 놈’이라는 식의 얘기를 종종 듣고 와서는 ‘아빠 정치 그만 하면 안 되냐’며 매달리는 거다. 신문기사, 방송 뉴스는 물론이고…. 친척들 시선까지 곱지 않아지더라.”
-국회의원은 수많은 이권집단의 로비 표적이 되게 마련이다.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과 관련한 ‘접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나.
“의원이 되면서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다. 움직이면 돈인데 솔직히 (돈이) 많이 아쉬웠다. 2000년 첫 후원회를 열자 1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왔다. 나는 ‘평소 내가 이렇게 인덕이 많았나’ 하며 내심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순위로는 200등이 넘는 수준이더라(웃음). 그마저도 지인들보다는 이른바 ‘앞으로 거래 잘 해보자’는 식의 제스처가 많았다. 의심스러운 걸 다 돌려주고 나니 반도 남지 않았다. 그때 참 갈등이 되더라. 의원한테 돈은 ‘무기’나 다름없는데….”
-다른 의원들도 그렇게 들어오는 돈을 돌려주나.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많은 선배들이 ‘산하단체 돈 다 돌려주면 무엇으로 정치 하냐’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한 2년 하고 나니 나중에는 아예 후원금을 넣지 않더라.”
-국회의원 한 번 하고 나면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한다더라. ‘금단증상’을 이겨낼 자신이 있나.
“그래서 나는 국회의원은 몇 년이라도 생업에 종사한 적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달리 세운 뜻이 있어 정계에 입문했다가도 준비한 것이 다 떨어지고 나면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인과 정치인을 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돌아갈 자신감’이 생기는 것 아닐까. 나 같은 경우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나마 자기 절제가 가능했던 것 같다.”
-오의원이야 변호사이니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늘 ‘언제든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인가.
“국회의원은 강해야 한다. 동료에게든 타 정당에든 관료들에게든 약하게 보였다간 아무 일도 못한다. 그런데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하나. 그런 말은 절대 못한다. 그러니 또 내 나름대로는 그 갈등으로 인한 속앓이가 얼마나 심했겠나.”
-이른바 ‘5, 6공 기여 인사 용퇴론’을 주장한 까닭에 최근에도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안다.
“힘들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틀린 말 하나 없다’며 격려해주는 동료, 선·후배들이 많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분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견디기 힘든 폄하와 조롱이 이어지더라.”
-17대 총선을 통해 등장하게 될 정치 초년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처음부터 사익 추구를 목표로 국회의원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처음에는 다 나름의 우국충정이 있을 것이다. 그 초심을 잘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언제 그만둬도 떳떳하게 제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되겠다는 결심으로 도전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치는 이것으로 끝이라면서 왜 인터뷰에는 응했나. 혹 다른 꿈이 있는가.
“그런 질문은 좀 그렇다. 이런 인터뷰 역시 내 나름의 사회 참여다. 내가 무슨 초야에 묻히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나. 외국에서 1년쯤 공부한 뒤 돌아와 환경전문변호사로 활동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