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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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의리’ 오늘은 ‘법대로’

노대통령 노동관 신분 변화 따라 보수화 경향 … 철도 파업 때 심한 배신감 느낀 듯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3-11-19 1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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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의리’ 오늘은 ‘법대로’

    노무현 대통령(가운데)이 6월1일 서울의 한 삼계탕집에서 재계 인사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건배하고 있다. 왼쪽부터 손길승 SK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노대통령,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노(盧)가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노(勞)의 헛된 바람이었나.

    노무현 대통령의 ‘노동이력서’는 노동문제에 대한 그의 자부심만큼이나 화려하다. 정규학력 고졸인 노대통령의 최종학력은 ‘1998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그만큼 노대통령의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과 식견은 남다르다. 1985년 노동법률상담소를 세우고 노동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그는 ‘아스팔트 변호사’라고 불리며 각종 노동현장에서 강연에 나서 수많은 노동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80년대 부산에서 노대통령과 인권변호사 생활을 함께한 이흥록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63·변호사)은 ‘변호사 노무현’을 이렇게 기억한다.

    “노변호사는 가슴으로 노동자를 끌어안았다. 당시로선 변호사가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든다는 것은 떠올리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노변호사는 87년 대우조선 파업 때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노변호사는 무료 변론으로 생색이나 내는 그런 인권변호사가 아니었다. 그에게 노동자는 ‘동지’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노동계는 요즈음 노대통령을 “노동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선무당이 노동자를 옥죈다”고 꼬집는다. ‘어제의 동지’가 ‘노동자의 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셈이다. 11월3일 청와대에서 열린 ‘노동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했던 한 노동계 인사는 “노대통령이 참석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노동문제에 관해선 자신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대화를 이끌어가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대통령은 왜 ‘과거의 동지’를 버리고 그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인간 노무현’의 노동관은 인권변호사에서 야당 국회의원으로, 다시 여당 정치인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떻게 변화해왔을까.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 80년대부터 노대통령의 언행을 따라가 보자.



    “…악법을 깨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파업이죠. 저는 방위산업체 71개 사업장이 몽땅 파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88년 12월26일 현대중공업 파업집회 현장에서 한 연설에서)

    87년 6월 민주헌법 쟁취 항쟁을 전후로 영남지역 노동현장에서 ‘변호사 노무현’은 신화적 존재였다. 지금은 노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화물연대 김종인 노조위원장도 80년대 후반 노변호사의 강연을 듣고 가슴 깊이 감명받았다고 말한다. 노대통령이 노동자에 대해 느끼는 ‘동지의식’은 88년 총선을 통해 국회에 진출, 기성 정치권에 편입된 뒤로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13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노무현’의 발언은 다소 위험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로 인권변호사 시절과 맥을 같이한다.

    “…재벌 총수와 그 일족이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에게 분배합시다….” “…재벌을 해체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재벌은 해체돼야 합니다….”(88년 7월8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92년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도 ‘정치인 노무현’의 노동관은 친노동자적 기조를 꼿꼿이 유지한다. 그는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과 변론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갈등이 있는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그 갈등을 중재하는 데 앞장섰다.

    어제는 ‘의리’ 오늘은 ‘법대로’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사태 때 노무현 대통령은 사측과 노측을 오가며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97년 대선 이후 ‘여당 정치인’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노대통령의 노동관은 서서히 보수화하기 시작한다. 현대차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이 노동자들에게 처음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 98년 현대차노조의 파업 때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98년 8월 노대통령은 노동자들 앞에서 노련한 여당 정치인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현대차노조를 편들어주려고 온 게 절대 아닙니다. 정리해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사태가 더 악화됩니다.”(98년 8월 현대차노조 집행부에게)

    당시 현대차는 대기업 중 처음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2만8000여 노조원이 공장을 점거한 채 농성 중이었다. 당시 현대차 김광식 노조위원장(현재 울산 북구 비정규직지원센터장)은 “내가 본 노무현은 전해 들었던 노무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노동자와 같은 편’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노련한 정치인으로 비쳐졌다”고 회고한다.

    “98년 즈음에 노대통령의 노동관은 이미 변해 있었다. 잡쉐어링이나 워크쉐어링이 바람직한 대안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무슨 얘기인 줄은 알겠다 싶었지만 무조건 정리해고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자유주의 논리에 깊이 빠져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98년 현대차 사태는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던 노대통령이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방점을 찍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첫번째 사례다. 이후 노대통령은 2000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가 계란세례를 받는 등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순순히 따른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노총) 이정식 대외협력본부장은 “여당 정치인이 된 98년부터 노대통령은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면서 “노무현 정부에 대해 애당초 기대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초기 ‘노-노(盧勞)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지지기반이던 노동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는 듯 ‘사회적 힘의 균형’을 노동문제의 화두로 삼는다. 사회적 힘의 균형은 경영계에 비해 노동계의 힘이 약한 만큼 5년간 이를 바로잡겠다는 뜻이었다. 98년 이후 나타난 현실주의적 접근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무게추는 노동자 쪽에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 여론의 장(場)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노동계에 비해 경제계가 세다. 향후 5년간 이 같은 사회적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2월13일 한국노총 간담회에서)

    “노동문제는 공안문제가 아니라 경제문제다. 잘못된 것은 법과 원칙에 따라 대처하되 일반적으로는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3월17일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어제는 ‘의리’ 오늘은 ‘법대로’

    2월13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민주노총을 방문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를 우군이라고 여긴 노동계는 4월부터 각종 요구를 봇물처럼 터뜨리며 ‘정치성 파업’을 거푸 벌여나갔다. 조흥은행 매각 반대 파업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반대 연가투쟁이 정치성 파업의 대표적 사례다. 바로 이즈음부터 정부 일각에서 ‘법과 원칙’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노사문제에 대해 경제부처의 입김이 세지기 시작한 건 전교조의 연가투쟁과 현대차 파업이 벌어졌을 즈음이다. 산업자원부 등에서 현대차 피해 액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정부가 개입할 것을 주장했고 이러한 경제부처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노동부는 경제부처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결국 대화론자보다 강경론자들의 의견이 먹히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노대통령은 5월부터 노동계의 바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국제 수준으로 확보될 것”(5월12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한 월가 금융계 인사들과의 간담회에서)이라는 발언은 외교적 수사라고 치더라도 “최근 일부 노동운동은 도덕성과 책임성을 잃어가고 있다”(6월1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파업 기간 중 임금 요구, 해고가 쉽지 않은 점 등의 특혜를 해소해야 한다”(6월27일 스티브 포브스 포브스지 발행인 접견에서) 는 발언은 노동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노동계와 노대통령이 대립각을 세우게 된 직접적 계기는 철도노조 파업이다. 6월28일 새벽 6시 정부는 구조개혁법안의 국회 처리를 반대하며 연세대 대강당 등에서 농성중이던 철도노조 조합원을 상대로 경찰력을 투입한다.

    노대통령은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배신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에서 노동정책을 담당했던 인사는 “대강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에서 노조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정략적인 파업을 벌이는 행태를 보고는 누구라도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 그대로 … 단지 자리 바뀌었기 때문”

    “지금 철도노조가 파업하면 깨진다,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박살난다. 철도노조뿐 아니라 노동운동 전체가 박살나게 되어 있다, 공무원연금이 문제라면 해결해주겠다, 노대통령과 총리실 건설교통부 사이에도 그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파업만 안 하면 훨씬 좋은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다, 하고 철도노조위원장에게 직접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건 파업이었다.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와 철도노조 모두가 “배신당했다”고 주장하는 철도노조 파업은 청와대가 정부를 밀면 밀릴 것이라고 믿는 노동계를 꺾어야 할 시점이라고 확신하게 된 계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이 사실상 노대통령을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 무렵이고 이후 노대통령의 발언도 점점 수위가 높아진다.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목매 자살한 것에 대해)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11월4일 국무회의에서)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 단체가 아니다.”(11월10일 4당 원내총무와의 간담회에서)

    현재로선 노동계가 ‘80년대의 노무현’을 꿈꿨다면 그건 헛된 바람이었던 듯싶다. 노대통령의 노동관은 시대의 변화, 처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 ‘노동자’는 동지에서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엔 ‘법과 원칙’에 따라 대해야 할 대상으로, 다시 ‘법과 힘’으로 다뤄야 할 존재로 바뀌었다.

    이흥록 인권위원은 “노대통령의 노동자에 대한 애정은 지금이나 80년대나 같다. 다만 대통령이란 자리에서 노동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처지가 달라졌는데, 국민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대통령이 된 지금 혈기왕성한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고 지적한다. 노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가장 강력히 정부를 비판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제가 변호사 때 열심히 변호하고 면회 다니고 했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저는 그분들 만나면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5월28일 노사협력 유공자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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