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에 의한 말라리아 감염사고는 말라리아 유행지역 내 군부대 단체헌혈이 주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수혈로 인한 감염 없다” 발뺌
문제는 부산에서 강씨가 헌혈한 날로부터 7개월 후인 2002년 8월15일 서울에서 실시한 말라리아 항체검사 결과 강씨의 혈액이 또다시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점. 결국 1년 사이 두 차례의 말라리아 항체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온 강씨의 혈액이 그 기간에 채혈돼 아무런 검사 없이 대학병원에 공급된 셈이다(적십자사 내부자료 참조). 취재 결과 강씨는 매년 8월 말라리아 발생 위험지역인 강원 철원군 소재 기도원에 들어가 2~3일씩 철야기도를 해온 것으로 드러나 혈액의 말라리아 감염 가능성을 더욱 높게 하고 있다.
강모씨(56)의 헌혈정보. 2002년 1월1일 헌혈 증서번호에 ‘04’라고 표시된 부분이 부산혈액원에서 혈액검사를 했다는 표시(01은 서울 중앙혈액원). 말라리아 검사를 받지도 않은 강씨의 혈액은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은 것처럼 표시돼 모 대학병원에 공급됐다.
법정 3군 전염병인 말라리아의 수혈감염에 대해 은폐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전염병의 관리 주체인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와 국립보건원(이하 보건원), 혈액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적십자사측은 수혈에 의한 말라리아 감염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 복지부와 보건원은 “수혈에 의한 감염은 단 한 건도 발생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고, 적십자사측은 내부 역학조사를 통해 말라리아 수혈감염 사례를 발견하고도 이를 복지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적십자사 내부자료 ‘말라리아의 발생동향 및 예방대책’에는 1997년부터 2001년 3월까지 10건의 말라리아 수혈감염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적십자사측은 이 자료에서 “97년 9월에 말라리아 수혈감염 예방지침을 제정하고 98년 1월에는 수혈로 인한 말라리아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전산프로그램을 구축해 말라리아 환자의 진단 후 헌혈 혈액 및 항체 양성자 헌혈액의 유통을 금지하도록 조처하였으나 수혈에 의한 말라리아가 10예(例)나 발생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라리아 수혈감염 사고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특히 적십자사측은 이러한 수혈감염의 발생원인으로 “말라리아 발생지역이 휴전선 근처와 경기, 강원 북부지역의 군 주둔 지역인데, 이 지역 군인의 단체헌혈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수혈로 인한 말라리아 감염자는 생후 4개월짜리 영아 등 3명이 만 1세 이하의 유아였고, 68세 된 노인도 끼여 있었다. 지역별로는 서울 3명, 경기 울산 각 2명, 부산 경남 대구 각 1명이었으며, 수혈감염의 원인이 된 헌혈자는 모두 9명으로, 그중 현역군인이 4명, 제대군인이 3명 등 전방 군부대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된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나머지 두 명은 당시 말라리아 유행 지역이던 경기 고양시 주민과 경기 파주시를 2박3일 동안 여행한 사람이다.
말라리아는 얼룩무늬모기를 매개로 해 발생하는 까닭에 이에 대한 방역이 필수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적십자사가 역학조사를 통해 스스로 수혈감염자를 찾아내고서도 이에 대해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취재 결과 적십자사는 10명의 감염자 중 4명에게만 보상을 하고 나머지 6명에게는 치료비는커녕 위자료 한 푼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사의 헌혈 및 수혈사고 보상위자료 지급 시행규칙에는 수혈감염자에게 ‘상병보상위자료’를 지급토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한 것. 적십자사측은 이에 대해 아직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적십자사 안전관리부 조남선 부장(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은 “고의로 숨기려 했던 것은 절대 아니며 복지부와 보건원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혈액관리법상 감염사고의 보고 주체가 각 의료기관이기 때문”이라며 “감염사고 발생시 적십자사와 보건원, 복지부 간의 보고체계가 시스템화돼 있지 않은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적십자사 수혈감염 관련 내부자료와 적십자사가 수혈감염에 대해 대한수혈학회에 보고한 보고 문건.
15차례 양성반응 헌혈자 혈액도 공급
보건원측의 입장은 적십자사가 말라리아 항체검사를 시작한 것이 2000년 9월부터이므로 그 이전에 일어난 말라리아 감염사고는 어쩔 수 없다는 것. 적십자사는 법정 3군 전염병으로, 국내에서 완전히 퇴치된 줄 알았던 말라리아가 1993년에 다시 발생한 뒤 2000년에 환자가 4142명까지 폭증하자 그해 9월 혈액검사가 가능한 전국 7개 혈액원 중 서울의 중앙·동부·남부혈액원에서만 말라리아 항체검사를 시작했다. 그것도 ‘시범’으로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얼룩무늬모기를 매개로 해서 발생하는 삼일열말라리아가 경기와 강원 전방지역과 인천지역에서 주로 발생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적십자사의 말라리아 예방대책 내부자료에 밝혀져 있듯, 국내에서 유행하는 삼일열말라리아는 증상이 경미한 대신 오래갈 경우 무려 1~2년의 긴 잠복기를 거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말라리아 유행지역(위험지역)에 거주하다 말라리아에 감염된 군인이나 주민이 제대나 이사를 통해 혈액검사가 가능한 경기, 강원, 인천 지역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서 헌혈을 하게 된다면 수혈감염 사고에 대해 전혀 대비할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 충청, 경상, 전라, 제주지역 혈액원의 경우 말라리아에 대한 항체검사를 전혀 실시하지 않기 때문. 부산에서 헌혈한 강씨의 경우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17번의 헌혈 결과 말라리아 음성 판정을 두 번 받은 환자의 헌혈 정보. 음성반응이 나올 때마다 혈액은 각 병원에 공급됐다(위).혈액 상태는 ‘부적격’, 헌혈유보군(DDR) 표시란에는 말라리아 환자임을 나타내는 TM 표시가 선명하지만 이 혈액은 각 병원에 수혈용으로 공급됐다. 대한적십자사는 이에 대해 전산 오류라고 해명했다.
적십자사 안전관리부의 한 관계자는 “말라리아에 대한 항체검사가 위양성률이 높은 데다, 말라리아 항체검사 자체가 혈액관리법에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전면 시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항체검사 결과 양성으로 판명된 혈액은 부적격 혈액으로 등록해 수혈용(혈장 제외)으로는 절대 쓰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행 혈액관리법상 혈액 적격 여부 검사에 포함된 질병은 AIDS(후천성면역결핍증·이하 에이즈), B형 간염, C형 간염, 매독뿐으로 말라리아는 복지부 지침으로 양성인 경우에 한해, 그것도 수혈용만 폐기처분토록 되어 있다(혈액제제용 혈장 공급은 가능하다). 이 때문에 에이즈와 각 질병의 경우 혈액선별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았으나, 과거의 검사결과가 양성인 혈액, 즉 한 번이라는 양성 판정을 받은 혈액은 별도 해제 절차를 밟지 않은 경우 비록 검사결과 음성으로 판명됐더라도 폐기처분하고 있으나(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지만), 말라리아의 경우는 항체검사 결과가 계속 양성반응이 나오다 한 번 음성이 나온 경우는 이를 그대로 수혈용으로 각 병원에 공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적십자사 내부자료에 따르면, 심지어 2년7개월 동안 17번 헌혈해서 15차례나 말라리아 항체 양성반응이 나온 사람의 혈액이 두 차례 음성반응이 나왔다는 이유로 수혈용으로 공급된 사례까지 있다. 또 치료 후 3년이 경과해 해지 절차를 밟았고, 그 중간에 한 번 음성 판정이 나왔다는 이유로 항체반응이 계속 양성으로 나오는데도 말라리아 병력자의 혈액이 수혈용으로 공급되기도 했다. 이 사람의 혈액정보에는 혈액 상태 ‘부적격’, 헌혈유보군 표시란에는 ‘TM’, 즉 말라리아 확진자(환자)라고 표시되어 있다.
적십자사 안전관리부측은 “항체는 말라리아 원충이 몸에 들어와 인체 면역시스템이 이를 이겨낸 경우에 생기는 것으로 말라리아 병력자의 경우 항체 양성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중간에 음성반응이 나온 혈액을 수혈용으로 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혈액정보가 부적격으로 나온 것은 전산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 감염내과의 한 관계자는 “면역이 생겨 항체가 형성됐다 하더라도 말라리아는 항시 재발할 수 있고, 항체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것은 면역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충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는 혈액이라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미국적십자사는 서울 북쪽 인근 지역을 말라리아 발생 위험지역으로 지정하고 이 지역출신 한국인이나 이 지역을 여행한 자국인과 외국인에 대해서 헌혈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