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직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모 의원의 후원회 모습(사진은 기사의 특정사실과 관계 없음).
5월에 후원회를 개최한 민주당 중진 L의원이 국감을 앞둔 최근 느닷없이 후원회를 개최, 동료의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통상 1년에 한 번 후원회를 개최하는 것이 관례. 이런 관례를 무시한 데 대해 동료의원들은 눈총을 준다. 심지어 노선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는 ‘동지’적 관계에 있는 인사들조차 눈을 흘긴다. 그러나 사정을 알고 보면 일면 수긍이 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는 최근 정부 전 부서가 신경을 써야 하는 ‘막강한’ 국회직을 차지했다. 이 국회직은 평소 장·차관 등 정부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는 “100만원짜리 봉투를 들고 가야 하는 자리”로 통한다. 국감을 불과 며칠 앞두고 열린 그의 후원회에는 정부 관료들을 비롯해 동료의원들이 대거 참석, 이 국회직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심판이 손 벌리는 형국 … “일단 주고 보자” 눈도장 찍기
총선과 신당 바람이 거센 여의도지만 한 꺼풀만 들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기류도 흐른다.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회 행사가 줄을 잇고 있는 것. 특히 국감을 앞둔 9월과 10월을 겨냥, 전략적 후원회를 준비하는 의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의원회관 대회의실 및 헌정기념관 대강당, 도서관 사용 일정 현황’에 따르면 국감 기간이 포함된 10월 한 달 동안 후원회 개최 예약을 한 의원은 총 52명. 다른 시설물을 이용하거나 지역구에서 행사를 치르는 의원들까지 포함하면 후원행사는 더 늘어난다.
9월에 행사를 개최했거나, 개최할 예정인 40여명을 합치면 국회의원 30% 이상이 9월과 10월 국회 회기 동안에 후원회를 개최하는 셈이다. 이처럼 의원들이 9월과 10월에 후원회를 몰아놓는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적 특성도 영향을 미쳤지만 국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감을 앞두고 후원회를 개최할 경우 웬만한 강심장을 가진 피감기관장이라도 무시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1년 동안의 국정과 예산 운용에 대한 판정을 앞두고 심판들이 손을 벌리는 형국’이니 피감기관으로서는 ‘일단 찔러주고 보자’고 타협안을 찾게 마련이다. 건설교통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A씨는 “9월 들어 소속 및 관련 상임위 의원들의 후원회에 얼굴을 내민 것이 도합 다섯 번”이라며 고개를 흔든다. 그의 고백이다.
“8월부터 의원 비서진들이 전화를 해서는 대북 문제와 관련해 이것저것 요구하며 방문을 요청해 자료를 가져다 주니 후원회 행사를 알리는 초청장을 주었다.”
9월 중순 국회 정무위 소속 B의원의 후원회를 찾은 모 기업 임원 C씨는 ‘국정감사 무용론’으로 후원회를 설명한다. 사주가 증인으로 채택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이 기업은 총력을 다해 증인 채택에 나선 의원과 접촉, 방어에 성공하는 듯했다. 후원회에 참석, 얼굴도장을 찍고 ‘냄새가 날’ 정도로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의원이 이 사주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최종 증인·참고인 명단에서 이름을 빼는 데는 실패했다.
대북사업과 관련, 정치권한테 호되게 당한 H그룹의 한 관계자가 기억하는 후원회에 대한 기억은 이보다 훨씬 부정적이다. 그는 “후원금으로 증인 채택을 막으려 한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며 “반강제로 사주와의 회동을 요구하는 막가파 의원도 있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의 후원회 행사를 알리는 각종 홍보물들이 국회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위).후원회 식전행사 모습(사진은 기사의 특정 사실과 관계 없음).
대다수 정치인들은 정상적으로 국감을 준비한다. 행정부처의 1년 ‘장사’를 꼼꼼하게 감사하느라 밤을 새는 의원과 보좌진들도 많다. 9월 한 달 국회의원회관의 경우 밤새도록 불을 밝힌 방이 많다. 그러나 몇몇 소수의 의원들은 이와 다른 느낌으로 국감에 임하고 있다. 최근 모 의원의 후원회에 참석한 정부부처 한 관계자는 “피감기관도 감사 준비로 바쁘지만 정치인들도 후원회 준비로 국감 준비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국감과 후원회 일정이 겹치다 보니 어느 한쪽도 집중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이래서 되냐는 자괴감도 들지만 한편으로 후원금을 내고 나면 후련하기도 하다. 설마 돈 받고 나서 (국감에서) 몹쓸 짓이야 하겠느냐.”
결국 이런 상황이라면 감사기관과 피감기관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생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는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이 어느 때보다 ‘실탄’ 확보에 신경을 쓰는 시기다. 상당수 의원들이 눈총을 받더라도 후원회를 강행하는 것은 이런 ‘정치 일정’과도 무관치 않다.
후원회 행사가 개최되면 국회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교통혼잡이 극심하다.
시민단체들이 의혹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이 같은 먹이사슬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후원금을 준 피감기관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주장이고, 일부 뜻 있는 정치인들의 자성이다. 결국 봐주기, 부실국감이 되는 것. 이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후원회와 국감 일정이 겹치지 못하도록 하는 법규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자금개정법을 발의한 한나라당 박승국 의원은 뇌물성 후원금을 줄일 수 있는 대안으로 ‘온라인 후원금’을 제시한다. 금융기관 계좌를 통해 후원금 이외 모든 자금을 불법으로 규정할 경우 부정한 거래는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후원제도다. 통상 후원회를 개최할 경우 1억5000만원에서 2억원 정도의 후원금이 걷히지만 통장으로 후원금을 모을 경우 5000만~1억원 정도가 ‘고작’으로, 상대적으로 호응도가 낮기 때문이다. 특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후원을 공개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입장도 강하다. 8월27일, 후원회를 준비했던 민주당 이훈평 의원은 행사를 전격 취소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측근으로, 그의 구속이 던져준 충격도 있지만 “국감을 앞두고 의원들이 후원회를 개최해 피감기관을 압박하고 있다”는 시민단체의 지적에 따른 것이다. ‘한 손에 국감자료를 들고 다른 한 손을 슬며시 내미는 듯한’ 이런 모습이 국회에서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