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종현 전 SK 회장의 무덤과 선영.
최교수가 전화상으로 말한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최근 SK 사주가 구속되고 SK 그룹 전체의 운명이 불확실해지면서 ‘SK 그룹의 몰락이 조상의 묏자리 탓’이라는 괴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괴소문은 몇 년 전 타계한 최종현 SK 회장의 묏자리가 문제이고, 그 터를 잡아준 지관이 최교수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 말이 흰소리하기 좋아하는 일부 ‘풍수쟁이’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기자들 사이에서도 나돌아 한 기자가 최교수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전화까지 걸어왔다.
뜻밖의 전화를 받은 최교수는 어이가 없었다. 우선 최교수가 고 최회장의 장지 선택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 둘째는 고 최회장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묘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을 장려했고, 스스로 화장을 택했기 때문에 풍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SK 선영 확인 결과 대체로 무난
그런데 왜 이러한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고 있는 걸까. 고 최회장이 생전에 최교수와 가까웠던 건 사실이다. 최교수가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재야로 밀려나자 고 최회장이 최교수의 학문적 능력을 아까워하며 연구활동을 지원한 것이 시작이었다.
고 최회장의 후원으로 최교수는 조선조 풍수학 4대 고시과목 가운데 ‘청오경’ ‘금낭경’을 역주하여 발간했고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등 다양한 풍수담론을 만들어내며 ‘자생풍수’의 기반을 닦았다. 고 최회장은 풍수학 연구를 위한 연구소 설립까지도 지원하려 했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고 최회장은 죽기 전 자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유언에 따라 서울 시내 납골묘지에 안치될 예정이었던 그의 유골은 화장장 건립이 지지부진하면서 경기 화성에 있는 선영에 모셔지게 됐다. 이 과정에서 땅을 아주 깊이 파고 매장했는데 그 까닭은 몇 년 전 롯데 신격호 회장 선영 도굴 사건에서 보듯 도둑들이 돈 많은 이들의 유골을 도둑질해 그 후손들에게 거액을 요구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교수의 얘기를 듣는 동안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선 약 1400년 전 수나라 황제와 풍수학자인 소길(蕭吉)의 일화다. 당시 수 문제의 부인 헌황후(獻皇后)가 죽자 황제는 소길에게 장지를 잡게 했다.
소길은 무산(筮山)의 한 곳에 자리를 잡아 황제에게 “이 자리는 2000년이나 명당발복해 200세 후손까지 지켜줄 자리”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길흉화복이란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것이지 땅의 좋고 나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 조상 무덤 자리가 나빴다면 나는 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좋았다면 왜 내 동생이 전장에서 죽었겠는가?”
같이 전쟁에 참가해 동생은 죽고, 자신은 황제가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풍수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생전의 최종현 회장(오른쪽)과 구속되기 전의 최태원 회장.
이때 매개가 되는 것은 조상의 유골이다. 지관들은 자주 ‘뼈대 있는 집안’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그런데 매장하지 않고 화장할 경우 유해가 사라지고 한 줌의 재만 남기 때문에 매개체가 없어진다. 따라서 음택풍수 논리를 설혹 100% 인정한다 하더라도 화장을 한 경우 후손이 명당발복의 득을 얻을 리도 없겠지만 불행한 일을 당할 리도 없는 게 당연하다.
최교수와의 통화를 끝낸 후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니 모 스포츠신문에 고 최회장 선산에 대한 선동적인 글이 있었다. 내용인즉 선영 앞으로 고압선이 흐르고, 우백호 자락이 훼손되고, 그 앞으로 고속전철이 지나가니 앞으로 안 좋을 것이며 따라서 이장을 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협박에 가까운 글이었다. 심지어 고 최회장 형제가 장수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선영 탓이란다.
이 정도 내용이면 이미 풍수의 금도와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최종현 집안이 국내 재벌로 성장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일부 지관과 언론은 SK가 한창 잘나갈 때에는 이 선영이 명당 터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필자가 고 최회장의 묏자리를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묘역을 찾았을 때 묘 입구는 철조망과 자물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허락 없이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 주변에 아무도 없기에 철망을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들어오지 말라’는 땅에 억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풍수의 기본 윤리다.
그래서 편법을 쓰기로 했다. 선영 반대쪽에서 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길을 잃은 등산객으로 가장해 해당 선영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고 최회장의 선영은 잔디가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일반 분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윗대부터 차례로 내려 쓴 묘역 하단에 있는 고 최회장의 무덤에는 아예 비석이나 상석조차 없었다. 뒤 주산에 해당하는 것은 한 일(一)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곳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능선이 내려와 묘역을 이루었다. 또한 좌우에 산들이 비교적 잘 감싸고 있어 외부에서는 보기가 어려웠다. 죽은 자의 휴식처로서 그만한 땅도 드물었다. 물론 완벽한 천하의 명당은 없다(風水無全美). 어느 땅이나 아쉬움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아쉬움은 조경으로 충분히 보완된다. 이것을 일러 비보진압(裨補鎭壓) 풍수라 했고, 최교수는 여기서 바로 ‘자생풍수’라는 담론을 이끌어냈다.
SK 선영보다 안 좋은 곳에 묘역을 조성한 이들이 더 많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집안의 대가 끊기거나 망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창 밖으로 눈을 돌려보라. 시야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무덤들이 이보다도 좋지 않은 묘역들이다.
수소문 끝에 알게 돼 길라잡이를 해주신 최낙기씨(46·선문대 사회교육원 풍수강사)도 이곳을 편안한 땅이라고 감평했다.
“고압선이나 고속전철이 지나가고 우백호 자락의 훼손이 심하다는 곳도 이곳과 상당히 떨어져 있어 풍수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특히 화장 후 한 줌의 재만이 안치된 고 최회장의 무덤과 그 후손의 길흉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풍수 밖의 일이다.”
답사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공연히 멋쩍어지고 말았다. 쓸데없는 소문에 휘둘린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러한 소문을 만들어낸 이들의 천박함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들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