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3주년을 맞았지만 회담의 주역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위기를 맞고 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회담의 당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곤궁한 처지에 놓여 있다. 김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정상회담 성사 과정의 뒷거래 의혹으로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고 있고 김위원장도 핵 위기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냉대와 압력으로 정권 자체의 존립을 위협받고 있다.
6월15일, 6·15공동선언 3주년 기념일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등 민간단체가 주최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회’가 유일한 기념행사였을 뿐, 정부가 주최한 행사는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 함께 비가 오는 가운데 서울 태릉컨트리클럽에서 조영길 국방장관, 김종환 합참의장, 송영근 기무사령관 등과 세 팀으로 나눠 골프를 ‘즐겼다’.
청와대는 이날 오후 청와대 녹지원에서 예술공연을 열고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의 6·15 관련 언급이 있을 것이라 예고했지만 예술공연은 우천으로 취소됐다. 이렇다 할 이벤트도 없이 6·15선언 3주년의 밤은 깊어갔고, 결국 노대통령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일체 공식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문희상 비서실장과 문재인 민정수석이 각각 “정상회담 자체는 특검의 조사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특검 시한 연장에 반대한다”며 특검 조사를 앞둔 김 전 대통령을 지원하고 나섰지만 어디까지나 대통령 측근의 말일 뿐 노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것과는 무게가 달랐다. 이런 청와대 기류와 무관하게 6·15선언 3주년을 맞는 정치권 분위기는 뜨거웠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놓고 극과 극의 평가를 내놓는가 하면 정파에 따라 평가마저 달리하며 공방을 펼치고 있다.
6월15일 저녁, 김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3주년 기념 TV인터뷰가 있은 직후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김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16일 아침 한 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조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 전 대표는 “남북정상회담을 특검 수사 대상으로 삼는다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한 것도 조사 대상이 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특검 수사 자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박준영 전 청와대 대변인도 최근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햇볕정책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경우 남북관계의 긴장으로 인한 외국자본 철수 등 경제에 미칠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며 “(노대통령) 지지자들은 특검이 수용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교동계 중심으로 DJ 옹호 … 특검 수사 강하게 비판
민주당 구주류 사이에서는 노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비교하며 노대통령의 외교 실패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구주류 당직자는 “노대통령의 대미, 대일 ‘굴욕외교’ 시비를 보면서 당내에서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식 자주외교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도 한반도 문제를 스스로 풀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자주외교의 소산이었다”며 “과연 노대통령과 특검이 이를 비난하고 평가할 자격이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계승할 것인가.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회의에서 참석자들이 회의자료를 챙기고 있다.
하지만 대선 승리 이후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에는 중대한 변화가 감지된다. 우선 노대통령의 대북 관련 발언에서 6·15선언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사라진 것.
15일 TV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6·15선언을 “한반도 긴장완화와 통일 과정의 로드맵”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서 김 전 대통령은 “6·15선언의 핵심 내용은 첫째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한 것이고, 둘째 남북이 자주적으로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에 기초해 통일정부를 만들자는 것, 셋째 정치·경제·사회문화·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심화하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핵심측근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도 영향을 끼친 임동원 전 대통령특보.
하지만 노대통령은 의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6·15선언을 외면해왔다. 취임 초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6·15선언을 계승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노대통령은 6·15선언의 핵심 합의사항으로 김위원장의 답방을 거론했지만, 합의의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은 앞서와 같은 세 가지를 6·15선언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이처럼 6·15선언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두 사람 간에는 적지 않은 시각차가 드러나기도 했다.
노대통령이 6·15선언과 햇볕정책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은 통일부가 공개한 대북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현정부 장관 가운데 유일하게 김대중 정부에 이어 같은 부처 장관을 맡고 있다. 통일정책의 연속성을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만들었다는 통일부의 대북정책에도 6·15선언의 골간은 빠져 있다.
‘남북한 평화공존과 번영’이 노무현 대북정책의 핵심이다. 햇볕정책이 ‘퍼주기’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대북정책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심지어 통일을 향한 로드맵 대신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이 장기과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통일 로드맵’이 빠진 대북정책이라는 비판에 대해 청와대 대북정책팀의 한 관계자는 “통일정책이 달라졌다는 일부의 비판은 알고 있다. 하지만 큰 줄거리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전면에 내걸었던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북핵 문제가 터진 것이 그렇고,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위상도 이라크전 이후 크게 높아졌다. 달라진 상황에 맞춰 대응하는 구체적 방식이 달라졌을 뿐, 대북정책의 기본정신이 변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반론에도, 노무현 정부는 한나라당이 제안한 특검제를 수용함으로써 출발부터 김대중 정권의 계승보다는 김대 중 정권과의 차별에 방점을 두려 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특검제 수용의 경우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외양을 갖추기는 했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노대통령 핵심측근 사이에 이미 특검 수용이 검토되는 등 치밀한 검토가 있었고, 이를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감지됐다.
앞서 청와대 관계자의 주장처럼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의 골간이 화해와 평화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6·15선언을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이르다. 이런 상황에서 특검 기한 연장을 둘러싼 정치권 공방이 시작되고 김 전 대통령마저 TV를 통해 국민여론에 직접 호소하고 나서자, 노대통령 진영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희상 비서실장과 문재인 수석이 잇따라 특검 기한 연장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 그 방증이다.
특검 수사를 둘러싸고 민주당 신·구주류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정치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노대통령은 동교동계 중심 구주류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민주당 내 중도파들도 구주류 쪽으로 급속히 쏠리는 모습이다.
이처럼 노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간의 대북정책을 둘러싼 차이와 이견이 민주당 신당 창당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3주년을 맞는 6·15선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묵직한 고민거리를 정치권에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