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가운데)은 샤론 이스라엘 총리(왼쪽),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를 끌어들여 평화안을 이끌어냈으나 로드맵에 반대하는 잇딴 테러로 곤경에 빠졌다.
5월25일 이스라엘 내각이 ‘로드맵’ 평화안 승인을 결정한 것에 대해 이스라엘 방송과 언론이 사용한 표현이다. 이 결정을 ‘역사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 영토 내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설립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결정이 다른 누구도 아닌 ‘매파 중의 매파’, ‘이스라엘 우파의 구심점’ 샤론 총리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우파 정당의 연합이라는 연립내각에서 나왔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부시 행정부가 주창한 ‘로드맵’은 이-팔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3단계 평화안으로 각 단계마다 이-팔 양측이 이행해야 하는 각각의 과제와 이에 대한 시간표로 구성되어 있다. 이 평화안의 궁극적인 목표는 1단계: 현 대치국면의 진정, 2단계: 임시국경 내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설립을 거쳐, 3단계: 2005년까지 민감한 현안(팔레스타인 난민, 예루살렘, 정착촌 문제 등)에 대한 양측의 최종적인 타결안을 도출해내는 데 있다.
샤론의 로드맵 승인은 충격적 사건
샤론 총리는 이 로드맵에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리에 대한 거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14개 요구사항을 ‘부가조항’으로 달았다. 그러나 미국은 “충분히 고려하겠지만 현단계에서 로드맵에 수용할 수 없다”고 이 부가조항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승인안이 가결되자 당연히 반대표를 던졌던 리쿠드당과 종교정당의 매파 장관들 및 소속 의원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정치권 밖에서는 정착촌 주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로드맵이 1단계에서 이스라엘에 요구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2001년 3월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에 건설된 유대인 정착촌 및 외곽초소의 철거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내각에서 로드맵 승인안이 가결되기 전부터 “로드맵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끄는 길”이라며 반대해왔다. 그러다가 로드맵 승인안이 가결되고, 6월4일 요르단 아카바에서 열린 미국,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4자 정상회담에서 샤론 총리가 “즉각적으로 정착촌의 불법 외곽초소를 철거하겠다”고 약속하자 강력히 반발하며 본격적인 반대투쟁에 들어갔다. 정착촌 주민 대부분은 유대교의 정통파 종교인들로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영토로, 결코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들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자연히 이들이 느끼는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정착촌운동의 창시자이자 ‘정착촌의 대부’로 불리며, 평생을 군인과 정치인으로 살아오면서 일관되게 영토를 담보로 한 평화안에 반대해온 샤론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하아레츠’는 최근 분석기사에서 두 가지 점을 예로 들면서 샤론 총리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이츠하크 라빈 전 총리가 암살되기 전 몇 주 동안의 상황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첫째 극우계열이 샤론 총리를 ‘반역자’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라빈 전 총리 역시 1993년 오슬로협정에 서명했을 때 극우계열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된 바 있다. 결국 라빈 전 총리는 2년 뒤인 95년 평화집회에서 우익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둘째 아카바회담이 끝나고 나서 몇 시간 뒤 예루살렘의 시온광장에서 대규모 우익 시위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하아레츠’는 라빈 전 총리가 암살되기 정확히 한 달 전에 같은 장소에서 우익에 의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정보국 ‘샤바크’는 정치인들에 대한 극우계열의 공격 위협이 크다고 판단하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특히 샤론 총리를 비롯해 로드맵 승인을 찬성한 장관들에 대한 경호를 강화하고 있다.
‘가장 우파적인 내각이 가장 좌파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 로드맵 승인에 대해 좌파 및 평화주의자 계열에서는 일단 결정 자체에 대해서는 환영하면서도 샤론의 실제 의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는 가운데, 결국 우려할 만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카바 정상회담이 끝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방위군(IDF)의 헬리콥터가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의 지도자이자 대변인인 압둘 아지즈 란티시가 타고 가던 차량을 미사일 폭격한 것이다. 란티시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에서 아흐메드 야신에 이어 하마스의 2인자로 알려져 있고 팔레스타인 주민들 사이에서 대중적 인기도 높은 인물이다. 이번 이스라엘의 암살 시도는 하마스와의 대(對)이스라엘 휴전협상을 진행중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아부 마젠) 총리가 하마스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아부 마젠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로드맵 1단계에 의해서 ‘대이스라엘 테러 및 공격의 중지’라는 과제를 이행해야 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입장에서는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무력으로 굴복시킬 현실적 힘과 대중적 지지가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들과의 협상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인데, 하마스가 이 사건을 계기로 ‘협상종결’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 강요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스라엘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가벼운 상처만 입은 란티시는 가자지구의 한 병원에서 병상에 누운 채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마지막 한 사람의 시온주의 범죄자가 이 땅에서 축출될 때까지 우리는 성전(聖戰)과 저항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란티시가 부상한 직후 하마스의 또 다른 지도자이자 대변인인 마흐무드 알 자하르는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이 범죄가 가혹한 보복 없이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건이 워싱턴에 전달되자 부시 대통령은 깊은 유감의 뜻을 전했고,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이스라엘 총리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 발생 경위를 추궁했다. 도브 바이스글라스 총리 비서실장은 “란티시가 로드맵과 아카바 정상회담을 강력하게 비난해왔고, 수차례의 대규모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으로 사건 발생 경위를 설명했다. 그 예로 전날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에레즈 검문소와 헤브론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청년에게 IDF 병사 4명이 살해당한 사건에 란티시가 연루되어 있음을 들었다.
언론과 좌파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란티시냐’며 암살 결정을 내린 샤론 총리와 샤울 모파즈 국방장관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는 가운데 사건 발생 다음 날인 6월11일 오후 자하르 대변인의 경고는 현실로 드러났다. 예루살렘 시내 중심가에서 버스 자살테러로 19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현장에서 즉사한 범인은 헤브론 출신의 하마스 소속 팔레스타인 청년으로 밝혀졌다. 아카바 정상회담으로 인한 장밋빛 화해의 무드가 다시 피의 보복의 악순환인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샤론 내각의 로드맵 승인 결정 후 샤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결정 자체의 역사적 의미 및 평화안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격려하는 방향으로 보도의 초점을 맞추던 언론들은 “미국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샤론의 숨은 의도가 드러났다”며 샤론을 향해 일제히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로드맵은 실행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은 로드맵 실행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과연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