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민간소비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미국의 백화점과 소매 체인의 매출동향은 9월 이후 일제히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PC업계의 세일은 요즘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트북은 좀 덜하지만 데스크톱의 수요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델컴퓨터는 디멘젼2300 데스크톱을 599달러까지 깎아주고 50달러의 리베이트에 CD버너까지 끼워준다. 게이트웨이도 5월에는 849달러에 팔던 500SE 데스크톱을 699달러에 내놓고 100달러의 리베이트도 준다. 대부분의 모델에 50∼150달러의 리베이트가 따라붙는다.
주가 떨어지고 실업률 올라가고
특히 PC업계는 25% 할인 등 공격적인 세일 경쟁에도 불구하고 매출 감소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한 9·11 테러로 미국 경제에 커다란 충격이 우려되던 지난해 자동차업계는 미국 경제의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비장의 무기는 무이자 할부판매. GM 포드 등 대부분의 자동차회사들이 0%의 이자율로 할부판매를 실시했다. 미국에선 대부분 할부로 자동차를 구입하며, 이 경우 할부이자율 수준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지난해 민간소비가 활기를 띠면서 미국 경제는 한 고비를 넘겼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작년 1·4분기 -0.6%, 2·4분기 -1.6%, 3·4분기 -0.3%로 3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하다 9·11 테러 직후인 4·4분기에 오히려 2.7%의 성장을 보인 것은 바로 활발한 민간소비의 결과였다. 특히 4·4분기에 민간소비의 GDP 기여도는 4.05%나 된다. 다른 부문이 어렵지 않았다면 민간소비만으로도 4%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미국 경제의 3분의 2를 담당하는 민간소비는 지난해의 맹활약에 이어 올해도 경제를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해고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증시 침체가 오래가자 9월부터는 민간소비 역시 위축되어 경제분석가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증시에 투자된 돈의 상당액이 날아가버려 급기야 투자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 상태가 됐다”고 진단한다.
여기에 더해 고용 사정마저 좋지 않다. 올 들어 미국에서는 180만명이 해고됐다. 실업률은 9월 5.6%로 올 여름보다는 개선됐지만 신규 취업자 수가 한 달에 15만명은 돼야 실업률이 떨어질 텐데 현재 3만5000명 수준에 그치고 있다.
미국 증시는 2000년 3월을 피크로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월셔 어소시에이츠사의 집계에 따르면 미국 증시의 시가총액은 2년 반 사이에 50%, 8조5000억 달러가 날아가버렸다. 이는 일본의 GDP의 두 배나 되는 규모다. 이 기간중 미국 주식투자자의 재산이 평균 반토막 난 것으로 보면 된다. 소득이 없는 은퇴생활자의 투자자금 역시 절반 정도가 날아갔고 이는 소비생활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9월 자동차판매(연간 판매 대수로 환산한 수치)는 1630만대. 8월의 1870만대에 비해 상당히 위축됐다. 7∼9월중에도 무이자 할부판매가 계속돼 경트럭과 승용차는 연간 기준으로 1780만대가 팔렸지만 10∼12월중에는 1680만대로 줄어들 전망이다.
미국의 백화점 ‘매시’의 간판. 전반적 소비 불황 속에 ‘1달러 숍’이나 최고급 백화점만이 기존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자동차 의류 가전제품 등의 판매 부진으로 인해 미국의 소매동향은 9월중 1.2% 감소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최대의 감소폭이다. 판매업계는 “소비자들이 신용카드를 집어던지고 소득을 저축하려는 것인가” 하며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국 경제를 지탱해온 민간소비의 위축은 그대로 경기침체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이코노미스트 피터 크레츠머는 “주가의 변동에 소비자들은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이들의 태도 변화는 서서히 나타난다”면서 “주가하락이 오래 이어져 소비자들의 태도가 비관적이 됐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주가가 오르더라도 소비자들의 ‘닫힌 마음’은 금세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년간 증시에서 10만 달러대의 투자자금을 날린 보험사 직원 잰 비니(56)는 “요즘 가게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실토했다.
미시간 대학이 500가구를 조사해 발표한 소비자 체감지수는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듯, 9월 86.1에서 10월 80.4로 크게 떨어졌다. 이는 전문가들의 예상치 85.5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며 1993년 9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소비가 양극화 현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달러 트리’ ‘패밀리 달러’ ‘단돈 99센트점’ ‘달러 제너럴’ 등 최저가 상설 할인 판매점. 이 점포들은 야채나 먹을거리, 청소도구, 선물카드 등 모든 물품을 1달러씩에 판다. 메릴린치 증권은 이 점포들의 영업이 어느 소매점보다 활발해 앞으로 4년간 매년 17%의 매출 신장을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등 3개 주에 143개의 점포를 두고 있는 ‘단돈 99센트점’의 지난해 평균매출은 460만 달러로 경쟁사의 90만 달러를 크게 앞질렀다. 에릭 시퍼 사장은 “향후 10년 동안 체인을 10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
매출이 신장되는 또 다른 곳은 최고급품 판매점이다. 여성의류 보석류 화장품과 디자이너들이 만든 핸드백이 특히 잘 팔린 니만 마커스 백화점의 9월 매출은 16.1%나 껑충 뛰었다. 삭스(3.3%) 노스트롬(1.7%) 등도 이보다는 못했지만 증가세를 지켰다. 고급 핸드백과 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코치사도 판매 호조에 힘입어 매출 목표를 상향조정했고 공기정화기 마사지 의자 등을 판매하는 샤퍼 이미지사는 9월 매출이 37% 늘었다고 발표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그동안 소득의 1.2배를 지출해왔다. 소득을 넘치는 부분은 대출을 받아 썼다. 이제 고용과 증시가 되살아나지 않으면 종전과 같은 활발한 민간소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요즘 노동자의 평균근무시간과 생산성이 약간 늘어난 데에서 고용증가의 희망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