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여자’. 최근 일부 언론이 이대 목동병원 비뇨기과 교수로 임용된 윤하나씨(32·사진)에게 붙여준 호칭이다.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쳐 교수 자리에 오른 그녀에게 이들 언론은 ‘용감하다’는 말을 썼다. 윤교수가 자신의 교수직을 반대하는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우기라도 한 것일까. 분명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용감하다’는 말일까?
각 언론은 그 이유를 윤교수의 전공과에서 찾았다. 윤교수가 여성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비뇨기과에서 교수직에 올랐는데, 지금껏 비뇨기과는 ‘금녀의 영역’이었다는 것. 앞뒤를 맞춰보면 ‘남자 환자의 성기를 매일 보거나 만져야 하는 까닭에 여자 의사들의 지원이 전무했던 비뇨기과에 ‘용감하게도’ 여자 의사가 지원을 해 전문의를 따고 그것도 교수까지 된 것이 신기한 일’이라는 식으로 풀이가 된다. 결론적으로 그간 여자 의사들이 비뇨기과에 가지 않았고, 윤교수가 비뇨기과에 처음 갔기 때문에 ‘용감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신기한 것은 윤교수의 교수 임용이 아니라 비뇨기과를 찾는 환자가 남성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언론의 단순함이다. 여성에게도 비뇨기는 있고 여성의 상당수가 비뇨 계통의 질환 때문에 고민한다. 물론 여성에게도 성기능 장애는 심각한 문제다. 다만 비뇨기과에 지원하는 여자 의사가 없는 까닭에 이런 환자들 대부분은 산부인과 여의사를 찾았던 것이 현실이다. 지금껏 방광염, 요도염, 요실금 등 분명 비뇨기과에서 진료해야 하는 분야를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함께 보아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윤교수가 남자 환자들을 진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교수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세전공은 분명 여성 배뇨와 성기능 장애 분야다. 윤교수가 비뇨기과에서 여성 최초로 전문의가 되고 교수가 된 의미와 의의는 여기에 있다.
이제 요도염이나 방광염에 걸렸는데도, 혹은 성기능에 장애가 있는데도 산부인과 문밖을 서성대는 여자 환자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교수직 진출로 여자 비뇨기과 전문의 양산시대의 물꼬를 텄다는 점, 그래서 더 많은 여자 환자들이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문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여성의 비뇨기과 전문의 진출을 희화화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각 언론은 그 이유를 윤교수의 전공과에서 찾았다. 윤교수가 여성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비뇨기과에서 교수직에 올랐는데, 지금껏 비뇨기과는 ‘금녀의 영역’이었다는 것. 앞뒤를 맞춰보면 ‘남자 환자의 성기를 매일 보거나 만져야 하는 까닭에 여자 의사들의 지원이 전무했던 비뇨기과에 ‘용감하게도’ 여자 의사가 지원을 해 전문의를 따고 그것도 교수까지 된 것이 신기한 일’이라는 식으로 풀이가 된다. 결론적으로 그간 여자 의사들이 비뇨기과에 가지 않았고, 윤교수가 비뇨기과에 처음 갔기 때문에 ‘용감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신기한 것은 윤교수의 교수 임용이 아니라 비뇨기과를 찾는 환자가 남성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언론의 단순함이다. 여성에게도 비뇨기는 있고 여성의 상당수가 비뇨 계통의 질환 때문에 고민한다. 물론 여성에게도 성기능 장애는 심각한 문제다. 다만 비뇨기과에 지원하는 여자 의사가 없는 까닭에 이런 환자들 대부분은 산부인과 여의사를 찾았던 것이 현실이다. 지금껏 방광염, 요도염, 요실금 등 분명 비뇨기과에서 진료해야 하는 분야를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함께 보아왔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윤교수가 남자 환자들을 진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교수가 전문적으로 연구한 미세전공은 분명 여성 배뇨와 성기능 장애 분야다. 윤교수가 비뇨기과에서 여성 최초로 전문의가 되고 교수가 된 의미와 의의는 여기에 있다.
이제 요도염이나 방광염에 걸렸는데도, 혹은 성기능에 장애가 있는데도 산부인과 문밖을 서성대는 여자 환자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교수직 진출로 여자 비뇨기과 전문의 양산시대의 물꼬를 텄다는 점, 그래서 더 많은 여자 환자들이 편안하게 진료받을 수 있는 문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여성의 비뇨기과 전문의 진출을 희화화하는 일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