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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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지상·지하는 물론 화장실에도 광고 영상 홍수 … 창조성 박탈, 단절 가속화 문제 심각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07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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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흐르는 가운데 수사관 존 앤더슨(톰 크루즈)이 지휘하듯 멋지게 팔을 휘두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존이 지휘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영상이다. 그는 손짓 하나만으로 갖가지 영상을 자유자재로 편집하며 범죄 장면들을 확인한다.

    이 영화의 ‘영상 폭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갖가지 영상들이 쉴새없이 쏟아진다. 어느 곳이든, 심지어 어느 가게든지 들어가기만 하면 영상기구에 손님의 얼굴이 비치며 “앤더슨씨,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흘러나온다. 존은 홀로그램 영상을 통해 죽은 아들을 바라보며 추억에 빠지기도 한다. 심지어 신문마저도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있다. 사람이 영상을 보는지, 영상이 사람을 보는지조차 헷갈리는 이 미래 사회의 장면들은 실로 끔찍하다. 그런데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배경이 된 미래는 겨우 2054년, 불과 50년 후다.

    미래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다. 영상은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이미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사방에 다섯 개의 대형 전광판이 보인다. 지난 한·일 월드컵 당시 큰 역할을 한 거리 전광판이다. 가끔 뉴스가 나오기도 하나 이 전광판들이 쉴새없이 보여주는 것은 대부분 광고다. 택시기사 정우진씨(39)는 “요즘은 어디 가도 광고판 아니냐, 옛날에는 신기하게 보기도 했지만 요즘은 쳐다봐도 아무 느낌이 없다”고 심드렁하게 받아넘긴다.

    “어디를 가도 광고판 아무 느낌도 없다”

    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지상뿐만 아니다. 지하철역 플랫폼에는 대형 TV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광고와 영화 예고편이 번갈아가며 방송된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워터보이즈’ ‘아이스 에이지’ 등 화면 속에 뜨고 있는 영화 광고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지하철을 타도 사정은 마찬가지. 올해 6월부터 지하철 3호선 48개 차량 중 30개 차량에 TV 모니터가 설치되어 각종 TV 프로그램과 광고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돌려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화면을 바라본다. 마침 화면에서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이 한참 흐르고 있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 주인공에게 여주인공이 울며 절규한다. 그러나 대사가 자막으로 처리되는 바람에 입을 벙긋거리는 여배우의 모습은 묘하게 희극적이다. 한참 화면에 빠져 있던 이유진양(16)은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며 “저녁에는 ‘인어아가씨’처럼 인기 있는 드라마도 해준다”고 전했다.

    지하철 외에도 공항을 오가는 리무진 버스, 새마을호 열차 등에 소형 모니터가 설치되는 빈도수는 점차 늘고 있다. 버스를 탄 회사원 정희영씨(38)는 “눈이 어지러워 잠도 못 자겠다. 이건 인권침해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아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하러 카페나 음식점에 들어가도 영상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요. 이제는 조용히 앉아서 이야기할 공간도 찾기 힘듭니다.”

    정씨의 말처럼 카페, 상점 등에도 영상은 무차별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명동의 한 스포츠용품점 안에 설치된 멀티비전에서는 스포츠 광고와 뮤직비디오가 쏟아져 나온다. 이 가게의 판매원은 “사람들이 지나가다 멀티비전도 볼 겸 가게에 잘 들어오고 들어와서도 오래 있다가 나간다”며 “나름대로 손님을 끌어 모으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상은 대형 전광판, 음식점의 TV 화면 등에 그치지 않고 보다 내밀한 공간으로 파고들어가고 있다. 코엑스 몰에 설치된 인터넷 공중전화기 ‘웹텔’에는 24인치 모니터가 달려 있다. 15초간 광고를 보면 공짜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는 화장실마저도 광고영상의 홍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종문화회관과 외식업체 TGIF의 화장실 안에는 각종 광고들을 방송하는 소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 안에서까지 영상을 보아야 하다니. 이만하면 가히 영상의 홍수, 아니 ‘영상 폭격’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이 같은 ‘영상 폭격’에 무신경하다. 뮤직비디오가 멀티비전으로 방송되는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혜원씨(29)는 ‘점심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실 때 일부러 이리로 온다’고 말했다. “직장 동료들과 매일 할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오면 가수들 뮤직비디오를 볼 수가 있잖아요. 뮤직비디오 보면서 좀 쉬다 가는 거죠.” 그녀에게 영상은 곧 ‘휴식’과 동의어였다.

    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진홍 교수(영상원)는 “영상이 범람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생각할 여지가 줄어든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은 하나의 TV 화면에 두세 개의 채널을 동시에 띄우고 보기도 할 만큼 영상에 익숙하다는 것. “물론 영상이 상상력을 키워주지는 못합니다. 고대인들의 독창적인 상상력, 예를 들면 중국의 기서인 ‘산해경’ 같은 상상을 현대인들은 더 이상 하지 못하죠. 대신 현대인은 기존의 장면들을 이어 붙여 모자이크 하듯, 레고 블록을 쌓듯 상상의 세계를 만듭니다. 영상물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그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 인식의 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의 김태형 간사 역시 ‘단순히 영상이 많아졌다는 것만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영상의 수보다 질에 있다’고 지적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영상은 이미 일반화된 현상입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 설치된 영상의 내용이 딱히 공공성이 있다고 볼 수 없는 내용, 예를 들면 제품광고 등에만 치우치는 것이 더 문제 아닐까요.”

    당신도 ‘영상 좀비’가 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거리 영상의 홍수’에 이토록 익숙하고 무관심한가. 도시건축가 정기용씨(기용건축 대표)는 “이미 현대인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계에까지 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TV부터 켭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죠. 영상과 음향이 비치는 속에서 비로소 현대인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이런 영상세대는 거리마다 넘치는 영상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정씨는 카페 등이 벽체를 멀티비전 같은 영상으로 장식하는 유행도 결국은 ‘침묵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벽은 원래 중성적인 공간입니다. 과거에는 벽에 그림을 걺으로써 이 침묵을 뚫었지요. 하지만 영상 세대는 정지해 있는 그림보다 움직이는 영상을 보며 더 큰 만족을 느낍니다.”

    영상 속에서 더욱 외로워진다

    그러나 경희대 도정일 교수(영문학)는 ‘영상세대’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다. 영상이 생각하는 능력은 물론, 사색과 관조의 여지를 박탈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람이 창조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에너지를 모으고 축적해야 하는데 영상은 그런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영상세대는 스스로의 기호도 없고 판단력도 없습니다. 외국에 비해 특히 우리나라가 심해요. 더욱 답답한 것은 교육이 이 같은 영상의 위험을 일깨워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리를 점거하고 있는 각종 영상들을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지난 96년 서울시는 ‘도시와 영상’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때 광화문의 대형 전광판을 통해 비디오아트 작품이 방영되는 등, 거리의 영상들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후 ‘미디어시티 서울’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아트 전시에서 거리 전광판을 미술적 용도로 사용하려는 작가들이 적지 않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거리에 각종 영상들이 앞 다투어 설치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광고에 있다. 광고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된 영상들이 비디오아트 같은 예술장르와 어울리기는 쉽지 않다. LG애드의 김현홍 차장은 ‘동영상은 정지해 있는 매체보다 광고 단가가 비싸다. 이 때문에 건물주들이 앞 다투어 영상 광고물을 설치해서 월드컵 이후 거리 영상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읽거나 생각하는 대신 영상을 보는 데에 더 익숙한 영상 세대는 영상이 없는 곳에 가면 불안을 느낀다. 이것은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현상’이다. 거리마다, 공간마다 설치된 영상들은 영상세대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한 광고들로 채워진다. 이 같은 상황이 ‘멀티미디어 시대’라는 멋진 말로 포장된다. 그 와중에 도심의 풍경은 더욱 삭막해져 가고 휴식의 여지는 사라지고 있다.

    공공미술기획가인 박삼철씨는 ‘매체 자체가 공적인 장소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 같은 사용자의 사적인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내보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참된 미디어 시대라면 미디어를 통해 쌍방향 교류,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거리에서 마주치는 영상들은 한결같이 상업적 목적의 광고들이죠. 이 속에서는 교류는커녕, 단절만 가속화됩니다. 그래서 최근 일부 건축가들과 도시미술가들을 중심으로 ‘도시에 여백 만들기’ 같은 주장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영상의 범람과 홍수 속에 황량해져 가는 도시를 구하자는 것이죠.”

    외롭지 않기 위해 영상을 보지만, 사람들은 영상 속에서 더욱 혼자가 되고 외로워진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리는 섬뜩한 영상 중독의 세계, ‘영상 좀비’들이 떠도는 세계가 다만 멀고 먼 미래에나 실현될 일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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