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한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도록 할 수 없다.”
지난 98년까지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후앙 아벨란제는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놓고 한국이 일본을 맹추격해 오자 결국 이런 속내를 드러냈다. 지난 96년 4월의 일이다.
당시에는 아벨란제가 이 정도로 한국의 월드컵 개최에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후 아벨란제가 일본의 광고기업 덴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축구 관계자들은 개최지 선정에까지 FIFA의 장삿속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덴츠는 FIFA의 마케팅 대행사인 국제스포츠연맹(ISL)의 지분을 49%나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02년 5월31일. 아벨란제는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개막식을 지켜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이 그렇게도 반대했던 한·일 공동 개최의 개막장면을 보면서 과거의 오만함을 반성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을까.
FIFA를 오늘날처럼 거대한 ‘축구주식회사’로 바꿔놓은 당사자인 아벨란제는 최근 축구계의 현안으로 떠오르는 FIFA 재정위기와 관련이 깊다. ISL은 아벨란제 시절에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월드컵을 극단적으로 상업화한 원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최근 FIFA의 재정위기 논란을 불러온 가장 직접적 원인은 ISL과 키르히미디어그룹의 파산이다. ISL은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TV 중계권료 계약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도산해 파문을 일으켰다. ISL의 도산은 프로테니스대회나 카레이싱대회 등에 대한 무리한 후원과 투자가 원인이라는 후문이다. FIFA로부터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계권을 확보한 독일의 키르히미디어그룹 역시 위성채널 등으로 사업영역을 급속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투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주무르면서 ‘축구재벌’로 군림해 온 FIFA로서는 이들에게 TV 중계권료를 넘겨준 대가의 일부를 떼일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데다 전반적 재정형편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다. ISL과 키르히미디어그룹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FIFA의 수입원으로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는 TV 중계권료 협상의 속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FIFA는 중계권료 협상 파트너로 아시아방송연맹(ABU), 유럽방송연맹(EBU) 등 각 대륙별 방송사 연합체를 택했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FIFA와 방송사 간의 협상전선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무래도 방송사측이었다. 말하자면 구매자시장(buyer’s market)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98년 대회를 계기로 축구의 상업적 잠재력이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축구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스포츠마케팅 업체들이 FIFA와 방송사 사이에 끼어들어 중계권료를 천정부지로 올려놓기 시작한 것.
이때 FIFA를 부추겨 TV 중계권료를 천문학적 수치로 올려놓은 회사가 바로 스위스의 ISL과 독일의 키르히미디어그룹이다. 키르히미디어는 유럽 지역 중계권 판매를 책임지고, ISL은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중계권 판매를 맡는 역할분담 방식이었다. 이들 ISL과 키르히 미디어는 FIFA에 98년 당시의 방송 중계권료 수입의 대략 10배를 보장하고 중계권료 독점판매권을 따냈을 것이라는 게 국제 축구계의 정설이다.
독점판매권을 따낸 두 회사는 중계권료 협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대륙별 방송연맹을 상대로 협상하던 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개별국가와의 일대일 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FIFA는 80년대 이후 계속 1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월드컵 중계권료를 2002년 월드컵부터 무려 10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방송 3사가 2002 월드컵을 위해 지불한 중계권료만 해도 약 3500만 달러로, 98년 프랑스대회와 비교하면 무려 24배나 뛰어오른 금액이다.
한국은 지상파 방송 외에 케이블TV 채널이나 위성채널이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케이블, 위성방송이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 중계권료 협상방식은 또 한 번 달라진다. 2002 월드컵의 공동 개최국인 일본만 해도 공영방송 NHK가 참여하는 저팬 컨소시엄이 40경기 중계에 6000만 달러를 지불한 데 비해, 위성방송 채널을 갖고 있는 스카이퍼펙트측에서는 64경기에 대한 중계권료로 지상파의 두 배가 넘는 1억45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 축구 열기가 유럽이나 남미보다 뒤떨어지는 미국 역시 FIFA 대행사로부터 중계권을 확보한 방송사는 스포츠전문 케이블 채널인 ESPN이다. 지상파 중에서는 ABC TV가 결승전 한 경기만 중계하는 데 20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그나마 이 한 경기에 대한 중계권료도 경기당 50만∼100만 달러 수준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중계권료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 등에 대한 FIFA 대행사측의 시장조사 결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3500만 달러 수준에 타결지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애초 ISL측은 1억 달러 정도를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ISL과 키르히미디어가 대행하는 월드컵 중계권료 명세를 FIFA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러 경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로 추정만 할 뿐이다.
협상방식 역시 일방적으로 FIFA측이 끌고 나가는 형태를 띠고 있다. 대부분 변호사들로 구성되는 FIFA측의 협상단은 FIFA의 자체 규정만 내세워 여기에 모든 것을 꿰맞추려 할 뿐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협상에 참여했던 한국측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ISL의 협상태도가 오히려 FIFA보다도 훨씬 고압적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FIFA의 비민주성과 비밀주의 때문에 정몽준 부회장을 비롯한 일부 개혁파 집행위원들은 FIFA의 재정 투명성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FIFA 역시 이런 비난을 의식한 듯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서울에서 열린 이번 특별총회에서 지난 4년간의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공개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올해 추정예산은 9억7000만 스위스프랑, 한화로 약 7575억원이고 금융위기에 따른 비용 증가로 올 추정비용이 12억2200만 스위스프랑, 즉 9544억원에 이른다. 아울러 FIFA는 지난 4년 동안 18억2300만 스위스프랑(1조4237억원)을 벌어들였고, 15억7800만 스위스프랑(1조2324억원)을 썼다. 그러나 문제는 FIFA의 예산회계가 기업처럼 1년에 한 번씩이 아니라 4년에 한 번씩 짜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데이비드 윌 FIFA 부회장 겸 내부감사위원장은 얼마 전 취약한 FIFA 재정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가 징계를 당했다. 또 블래터 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젠 루피넨 FIFA 사무총장은 더 이상 블래터 회장의 비민주적 운영과 재정운영의 혼탁상을 견디지 못하고 ‘주군’에 반기를 들고 나서면서, 그를 스위스 검찰에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FIFA가 투명한 운영으로 204개나 되는 회원국들의 신뢰를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60여 페이지 규모에 총 11조 21항으로 구성된 FIFA와 한·일 양국 조직위원회간의 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비밀유지’ 조항이 들어 있다. FIFA가 월드컵을 통한 개최국과의 수익배분에서 숙박료에 이르는 시시콜콜한 내용의 계약조항까지 일체 비공개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계약서 내용 중에는 협상 관계자들이 향후 10년간 계약상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FIFA는 철통보안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FIFA가 특별총회를 통해 예산을 공개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총수입과 지출 규모만 밝히는 것으로는 어느 회원국도 FIFA의 재정이 투명하게 집행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조직위원회의 재정 관계자는 “FIFA 예산 관련 자료는 총회에 제공된다 하더라도 대외비 형식으로 집행위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어서 조직위원회에서 이 자료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비민주성과 불투명성 때문에 비판적인 사회학자들은 아예 FIFA의 성격을 스포츠단체가 아니라 ‘국제체제’(international regime)로 규정하기도 한다. ‘WTO체제’나 ‘IMF체제’처럼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거대한 작동원리라는 말이다. IMF체제가 변동환율제를 근간으로 하고 WTO체제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듯, FIFA 역시 자체적인 룰을 가지고 회원국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FIFA 회원국이 IMF, WTO는 물론 UN 회원국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FIFA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감안할 때 국제축구연맹이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만한 ‘인터내셔널 레짐’이라기보다는 ‘앙시앵 레짐’(ancient regime)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98년까지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후앙 아벨란제는 2002년 월드컵 개최지를 놓고 한국이 일본을 맹추격해 오자 결국 이런 속내를 드러냈다. 지난 96년 4월의 일이다.
당시에는 아벨란제가 이 정도로 한국의 월드컵 개최에 거부감을 드러낸 이유에 대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후 아벨란제가 일본의 광고기업 덴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축구 관계자들은 개최지 선정에까지 FIFA의 장삿속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덴츠는 FIFA의 마케팅 대행사인 국제스포츠연맹(ISL)의 지분을 49%나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02년 5월31일. 아벨란제는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개막식을 지켜보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이 그렇게도 반대했던 한·일 공동 개최의 개막장면을 보면서 과거의 오만함을 반성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을까.
FIFA를 오늘날처럼 거대한 ‘축구주식회사’로 바꿔놓은 당사자인 아벨란제는 최근 축구계의 현안으로 떠오르는 FIFA 재정위기와 관련이 깊다. ISL은 아벨란제 시절에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월드컵을 극단적으로 상업화한 원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최근 FIFA의 재정위기 논란을 불러온 가장 직접적 원인은 ISL과 키르히미디어그룹의 파산이다. ISL은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TV 중계권료 계약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도산해 파문을 일으켰다. ISL의 도산은 프로테니스대회나 카레이싱대회 등에 대한 무리한 후원과 투자가 원인이라는 후문이다. FIFA로부터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계권을 확보한 독일의 키르히미디어그룹 역시 위성채널 등으로 사업영역을 급속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투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주무르면서 ‘축구재벌’로 군림해 온 FIFA로서는 이들에게 TV 중계권료를 넘겨준 대가의 일부를 떼일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 데다 전반적 재정형편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다. ISL과 키르히미디어그룹의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FIFA의 수입원으로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는 TV 중계권료 협상의 속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전까지만 해도 FIFA는 중계권료 협상 파트너로 아시아방송연맹(ABU), 유럽방송연맹(EBU) 등 각 대륙별 방송사 연합체를 택했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FIFA와 방송사 간의 협상전선에서 우월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무래도 방송사측이었다. 말하자면 구매자시장(buyer’s market)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98년 대회를 계기로 축구의 상업적 잠재력이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축구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스포츠마케팅 업체들이 FIFA와 방송사 사이에 끼어들어 중계권료를 천정부지로 올려놓기 시작한 것.
이때 FIFA를 부추겨 TV 중계권료를 천문학적 수치로 올려놓은 회사가 바로 스위스의 ISL과 독일의 키르히미디어그룹이다. 키르히미디어는 유럽 지역 중계권 판매를 책임지고, ISL은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중계권 판매를 맡는 역할분담 방식이었다. 이들 ISL과 키르히 미디어는 FIFA에 98년 당시의 방송 중계권료 수입의 대략 10배를 보장하고 중계권료 독점판매권을 따냈을 것이라는 게 국제 축구계의 정설이다.
독점판매권을 따낸 두 회사는 중계권료 협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대륙별 방송연맹을 상대로 협상하던 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개별국가와의 일대일 협상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해서 FIFA는 80년대 이후 계속 1억 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월드컵 중계권료를 2002년 월드컵부터 무려 10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방송 3사가 2002 월드컵을 위해 지불한 중계권료만 해도 약 3500만 달러로, 98년 프랑스대회와 비교하면 무려 24배나 뛰어오른 금액이다.
한국은 지상파 방송 외에 케이블TV 채널이나 위성채널이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지만 케이블, 위성방송이 커다란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 중계권료 협상방식은 또 한 번 달라진다. 2002 월드컵의 공동 개최국인 일본만 해도 공영방송 NHK가 참여하는 저팬 컨소시엄이 40경기 중계에 6000만 달러를 지불한 데 비해, 위성방송 채널을 갖고 있는 스카이퍼펙트측에서는 64경기에 대한 중계권료로 지상파의 두 배가 넘는 1억45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 축구 열기가 유럽이나 남미보다 뒤떨어지는 미국 역시 FIFA 대행사로부터 중계권을 확보한 방송사는 스포츠전문 케이블 채널인 ESPN이다. 지상파 중에서는 ABC TV가 결승전 한 경기만 중계하는 데 20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그나마 이 한 경기에 대한 중계권료도 경기당 50만∼100만 달러 수준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중계권료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 등에 대한 FIFA 대행사측의 시장조사 결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3500만 달러 수준에 타결지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애초 ISL측은 1억 달러 정도를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ISL과 키르히미디어가 대행하는 월드컵 중계권료 명세를 FIFA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러 경로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로 추정만 할 뿐이다.
협상방식 역시 일방적으로 FIFA측이 끌고 나가는 형태를 띠고 있다. 대부분 변호사들로 구성되는 FIFA측의 협상단은 FIFA의 자체 규정만 내세워 여기에 모든 것을 꿰맞추려 할 뿐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협상에 참여했던 한국측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ISL의 협상태도가 오히려 FIFA보다도 훨씬 고압적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FIFA의 비민주성과 비밀주의 때문에 정몽준 부회장을 비롯한 일부 개혁파 집행위원들은 FIFA의 재정 투명성을 꾸준히 요구해 왔다. FIFA 역시 이런 비난을 의식한 듯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서울에서 열린 이번 특별총회에서 지난 4년간의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공개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올해 추정예산은 9억7000만 스위스프랑, 한화로 약 7575억원이고 금융위기에 따른 비용 증가로 올 추정비용이 12억2200만 스위스프랑, 즉 9544억원에 이른다. 아울러 FIFA는 지난 4년 동안 18억2300만 스위스프랑(1조4237억원)을 벌어들였고, 15억7800만 스위스프랑(1조2324억원)을 썼다. 그러나 문제는 FIFA의 예산회계가 기업처럼 1년에 한 번씩이 아니라 4년에 한 번씩 짜이기 때문에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데이비드 윌 FIFA 부회장 겸 내부감사위원장은 얼마 전 취약한 FIFA 재정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가 징계를 당했다. 또 블래터 회장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젠 루피넨 FIFA 사무총장은 더 이상 블래터 회장의 비민주적 운영과 재정운영의 혼탁상을 견디지 못하고 ‘주군’에 반기를 들고 나서면서, 그를 스위스 검찰에 공금횡령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FIFA가 투명한 운영으로 204개나 되는 회원국들의 신뢰를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60여 페이지 규모에 총 11조 21항으로 구성된 FIFA와 한·일 양국 조직위원회간의 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비밀유지’ 조항이 들어 있다. FIFA가 월드컵을 통한 개최국과의 수익배분에서 숙박료에 이르는 시시콜콜한 내용의 계약조항까지 일체 비공개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계약서 내용 중에는 협상 관계자들이 향후 10년간 계약상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FIFA는 철통보안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따라서 FIFA가 특별총회를 통해 예산을 공개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총수입과 지출 규모만 밝히는 것으로는 어느 회원국도 FIFA의 재정이 투명하게 집행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조직위원회의 재정 관계자는 “FIFA 예산 관련 자료는 총회에 제공된다 하더라도 대외비 형식으로 집행위원에게만 제공되는 것이어서 조직위원회에서 이 자료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비민주성과 불투명성 때문에 비판적인 사회학자들은 아예 FIFA의 성격을 스포츠단체가 아니라 ‘국제체제’(international regime)로 규정하기도 한다. ‘WTO체제’나 ‘IMF체제’처럼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거대한 작동원리라는 말이다. IMF체제가 변동환율제를 근간으로 하고 WTO체제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하듯, FIFA 역시 자체적인 룰을 가지고 회원국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FIFA 회원국이 IMF, WTO는 물론 UN 회원국보다도 많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 FIFA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감안할 때 국제축구연맹이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만한 ‘인터내셔널 레짐’이라기보다는 ‘앙시앵 레짐’(ancient regime)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