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은 정치권과 국정원에 대한 로비 및 로비자금 전달 여부 등 크게 두 가지 측면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검찰 한 관계자는 “이 회사 주가가 경쟁 기업보다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회사 규모가 단기간에 비대해진 점 등에 정치권력과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윤씨의 정치 커넥션의 연결고리는 대략적으로 밝혀진 상태. 김현규 전 의원과 언론사 고위 간부인 K씨가 우선 거론된다. 김 전 의원은 지난 88년 국회의원 선거가 소선거구제로 바뀌자 같은 지역구(경북 군위·선산)인 김윤환 민국당 대표를 피해 대구에서 출마, 낙선했다. 이후 김 전 의원은 평소 연을 맺은 민주계 인사들에게 이런저런 민원을 부탁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97년부터 자동차 보안시스템 관련 사업을 구상했다. 이 과정에 윤씨를 만났다는 것이 그를 잘 아는 민주계 한 인사의 전언이다.
‘패스 21’과 연을 맺은 김 전 의원은 정치권 내 지인들을 동원해 사업 확장을 꾀했다. 이때 동원된 인물은 대략 9명. 이 가운데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은 1억원을 투자한 사실이 밝혀졌고 H의원과 P의원, 또 다른 P의원 등은 윤씨가 개최한 ‘패스 21’ 사업설명회에 참석해 구설에 올랐다.

윤씨의 로비 지도를 어렴풋하게 그려놓은 검찰은 윤씨가 동원한 로비자금에 대한 추적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검찰은 윤씨가 횡령한 회사 돈 20억원이 1차적으로 로비자금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또 윤씨가 2001년 초부터 자신이 보유한 주식을 집중 매각한 점도 눈여겨보고 있다. 이를 통해 챙긴 시세차액은 45억원 정도. 횡령 혐의를 받는 20억원과 합할 경우 60억원이 넘는 큰돈이 윤씨의 수중으로 들어간 셈이다. 검찰은 윤씨가 이를 정치권과 특정조직의 로비자금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좀더 심각하게 보는 대목은 ‘주식 로비’ 부분이다. 윤씨는 98년 9월 회사 설립 이후 몇 차례 유상증자를 거쳤지만 번번이 금융감독위원회에 유가증권 발행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검찰은 ‘누구에게 주당 얼마씩 몇 주 가량 팔았는지’ 공개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특정조직이나 정치권 인사들이 이 과정에서 윤씨로부터 주식을 무상으로 받거나 시가보다 싸게 매입하는 등 ‘혜택’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대가로 ‘패스 21’의 사업 확장과 주가 상승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게 검찰의 분석이다. 벤처 바람이 들불처럼 번진 1999년 말과 2000년 이런 식의 ‘기브 앤드 테이크’는 정치권과 정부기관 및 벤처업계의 대표적인 먹이사슬 구조였다.
윤씨와의 먹이사슬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정원이다. 검찰은 윤씨 사업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 12월22일 검찰은 ‘패스 21’의 차명주주 신원을 확인한 결과 국정원 관계자들 상당수가 실제 주주임을 확인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등 야당 인사들은 지난 11월 국회 재경위에서 “DJ 정부 핵심 측근들이 코스닥 시장에서 대규모의 정치자금을 만들었다는 제보가 당에 들어오고 있다”며 “그 과정에 특정조직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윤씨가 지난 14년간 국정원의 관리를 받아왔으며 국정원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국정원 내에서 사업설명회를 가졌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윤씨를 두세 차례 만나 관심을 표명한 점 등도 의혹 대상이다. 단편적인 사실들이지만 국정원 관계자들의 주식 보유 사실이 드러난 이상 하나의 선(線)으로 이어 분석할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벤처업계 한 관계자는 “윤씨는 국정원과의 특수 관계를 흘리며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국정원으로부터 기술을 공인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나중에는 “패스 21의 보안시스템을 국정원에 납품하기로 했다”는 얘기까지 보탰다고 한다. 패스 21은 이런 루머에 힘입어 한때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이 최고 80만원까지 수직상승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런 정황을 윤씨 혼자 연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윤씨는 바지사장이며 사실상 국정원이 ‘패스 21’을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는 의구심이다.
검찰 주변에서는 이번 사건이 ‘국정원 게이트’로 비화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경우 사건은 ‘진승현 게이트’ 등과 서로 얽혀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국정원과 검찰의 파워게임이다.
검찰은 이미 ‘진승현 게이트’ 등을 통해 국정원 고위 인사들과 관련한 비파일을 상당부분 축적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윤태식 리스트마저 보태질 경우 국정원에 대한 검찰의 파워는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렇지만 국정원 역시 검찰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정원 주변에서는 또 다른 벤처기업의 비리 등과 관련해 특정조직 연루설이 흘러나온다.
국정원과 검찰은 과연 ‘진검 승부’를 벌일 것인가. 두 기관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전망한다. 우선 검찰로서는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등이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국정원의 치부를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정기관의 양대 산맥인 국정원과 검찰의 파워게임이 자칫 정치적으로 해석될 경우 파문은 훨씬 커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윤태식 게이트’가 ‘소문만 요란한 잔치’로 끝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야당도 비슷한 시각이다. 한나라당 한 고위 관계자는 “언론에 엠바고까지 요청했던 검찰이 급작스럽게 이 사건을 키운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며 “진승현 게이트에 빠진 청와대와 로열 패밀리를 구하려는 맞불작전”이라고 분석했다.
검찰은 현재 패스 21의 차명주식 실소유주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찰이 파악한 차명주주는 대략 100여명. 이중 80여명이 여성 명의로 되어 있는데 이들 뒤에 국정원 관계자와 일부 정치인이 숨어 있는 것으로 검찰은 추정하고 있다. 이미 정치권에서는 여권 실세 K, P씨를 비롯해 민주당 당직자 H씨 등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며 한나라당 몇몇 인사 주변에도 묘한 긴장감이 피어오르고 있다. ‘게이트 공화국’ 대한민국의 신년 화두는 아무래도 윤태식 게이트에서 출발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