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분명 우연이었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한국영화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을 무렵, 소재면에서 너무 닮은 은희경의 장편소설 ‘마이너리그’가 출간되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친구’와 ‘마이너리그’는, 당사자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수산 서로 얽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은희경의 불운이었다. ‘친구’라는 강력한 지진이 문화시장을 강타한 다음에 나타난 ‘마이너리그’는 출판시장에서 아무리 선전하더라도 여진 정도로 평가받을 운명이었다.
굳이 전문가의 분석이 뒤따르지 않더라도 ‘마이너리그’는 ‘친구’의 호적수가 되지 못했다. 문화계 주도권은 이미 오래 전에 영상매체에 넘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영화를 소설로 번안한 ‘친구’가 출판시장에서도 우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도매상 송인서적 5월 베스트셀러 집계를 보면 4월에 3위였던 ‘친구’가 1위를 차지했고, 8위였던 ‘마이너리그’는 4위에 머물렀다. 90년대를 대표한 여성작가로서 평단의 지지도도 높은 은희경이 고배를 마신 것이었다.
‘친구’의 압승은 먼저 작품에 담긴 절실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작 ‘억수탕’과 ‘닥터 K’가 흥행에 참패한 곽경택 감독은 이 영화에 감독생명을 걸어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강박관념은 결국 그를 체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는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유발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절절히 배어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는 이 절실함이 없다. 비주류들의 사회적 박탈감에 대한 연민과 애정 또한 없다.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작가의 냉소만 있을 뿐이다.
작품성에선 ‘마이너리그’ 후한 점수
비평가들의 태도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영화평론가들은 ‘친구’가 ‘대박’을 터트릴 만한 작품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작품성을 인색하게 평가했다. 그 중 후한 평론가가 별 3개를 줬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평론가는 ‘친구’를 가리켜 노스탤지어를 이용한 퇴행의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에는 58년 개띠 평론가들의 상찬만이 뒤따랐다. 책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글은 가히 광고문구 수준이다. 비판의식을 잃은 평론은 존재가치가 없다.
‘친구’의 성공은 영화산업의 기반이 얼마나 튼실해졌는가를 입증하는 사례기도 하다.
자본·제작·배급·유통면에서 한국 영화계는 크게 성장했고 마케팅 기법 또한 한층 선진화했다. 이에 반해 우리 출판계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허약하기 짝이 없고(동네 서점은 잇달아 문을 닫았고, 온라인 서점은 경쟁적인 할인공세로 제 살을 깎아 먹고 있다), 마케팅 기법은 고전적이다 못해 고리타분하다. 언론보도와 신문광고가 사실상 마케팅의 전부다. 한 권의 책이 시장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함포사격’이 너무 빈약한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극약처방 차원에서 일을 벌이는 데, 그게 바로 사재기다(이 대목에서 오해 없으시길. ‘마이너리그’는 사재기 혐의가 없는 작품이다).
한국영화는 지난 10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국내시장 점유율 40%를 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다간 스크린 쿼터 폐지 압력이 다시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국영화의 잇단 성공을 지켜보며 출판계에 남겨진 숙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한국영화를 부흥의 길을 들어서게 한 여러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해 벤치마케팅하는 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아니 더 늦기 전에 권토중래에 나서야 한다. 문학이, 그리고 책이 지금처럼 영화의 뒤꽁무니나 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굳이 전문가의 분석이 뒤따르지 않더라도 ‘마이너리그’는 ‘친구’의 호적수가 되지 못했다. 문화계 주도권은 이미 오래 전에 영상매체에 넘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영화를 소설로 번안한 ‘친구’가 출판시장에서도 우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도매상 송인서적 5월 베스트셀러 집계를 보면 4월에 3위였던 ‘친구’가 1위를 차지했고, 8위였던 ‘마이너리그’는 4위에 머물렀다. 90년대를 대표한 여성작가로서 평단의 지지도도 높은 은희경이 고배를 마신 것이었다.
‘친구’의 압승은 먼저 작품에 담긴 절실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전작 ‘억수탕’과 ‘닥터 K’가 흥행에 참패한 곽경택 감독은 이 영화에 감독생명을 걸어야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강박관념은 결국 그를 체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는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유발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절절히 배어 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는 이 절실함이 없다. 비주류들의 사회적 박탈감에 대한 연민과 애정 또한 없다.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하는 작가의 냉소만 있을 뿐이다.
작품성에선 ‘마이너리그’ 후한 점수
비평가들의 태도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영화평론가들은 ‘친구’가 ‘대박’을 터트릴 만한 작품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작품성을 인색하게 평가했다. 그 중 후한 평론가가 별 3개를 줬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평론가는 ‘친구’를 가리켜 노스탤지어를 이용한 퇴행의 영화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에는 58년 개띠 평론가들의 상찬만이 뒤따랐다. 책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글은 가히 광고문구 수준이다. 비판의식을 잃은 평론은 존재가치가 없다.
‘친구’의 성공은 영화산업의 기반이 얼마나 튼실해졌는가를 입증하는 사례기도 하다.
자본·제작·배급·유통면에서 한국 영화계는 크게 성장했고 마케팅 기법 또한 한층 선진화했다. 이에 반해 우리 출판계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허약하기 짝이 없고(동네 서점은 잇달아 문을 닫았고, 온라인 서점은 경쟁적인 할인공세로 제 살을 깎아 먹고 있다), 마케팅 기법은 고전적이다 못해 고리타분하다. 언론보도와 신문광고가 사실상 마케팅의 전부다. 한 권의 책이 시장에 무사히 상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함포사격’이 너무 빈약한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극약처방 차원에서 일을 벌이는 데, 그게 바로 사재기다(이 대목에서 오해 없으시길. ‘마이너리그’는 사재기 혐의가 없는 작품이다).
한국영화는 지난 10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국내시장 점유율 40%를 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냈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다간 스크린 쿼터 폐지 압력이 다시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국영화의 잇단 성공을 지켜보며 출판계에 남겨진 숙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한국영화를 부흥의 길을 들어서게 한 여러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해 벤치마케팅하는 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아니 더 늦기 전에 권토중래에 나서야 한다. 문학이, 그리고 책이 지금처럼 영화의 뒤꽁무니나 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