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투자증권은 8월2일 웬만한 재테크 전문가에게도 낯선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유동화증권)를 국내 최초로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LG투자증권은 이날 60개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기초로 1조5000억원 규모의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 기관투자자가들이 전액 인수하도록 했다. 이어 대우증권도 8월11일 4394억원 규모의 프라이머리 CBO를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포함해 8월 말까지 발행 예정된 프라이머리 CBO 규모는 모두 4조6000억~5조3000억원. LG투자증권 김상덕 팀장은 “금융기관들이 목표로 한 10조원 규모의 채권형 펀드 조성이 완료돼 프라이머리 CBO를 중심으로 운영하면 기업들의 자금난이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체 프라이머리 CBO가 무엇이기에 기업 자금난에 숨통을 터줄 수 있단 말인가.
현재 채권시장은 한마디로 ‘죽어 있다’. SK증권 최명의 상무는 “삼성 LG SK 롯데 그룹 계열사들, 그리고 다른 그룹의 경우 초우량 계열사 몇 곳 외에는 아무리 금리를 높게 준다고 해도 회사채가 소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상무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인 데다 IMF사태 이후 각 금융기관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면서 투기등급 이하 채권에 대해서는 아예 투자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은 상태”라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시중에 돈이 남아돌고 있음에도 회사채 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라이머리 CBO란 기업이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 발행이 힘들 경우 여러 기업의 회사채를 한데 묶은 뒤 신용보증기관이 신용보증을 서주도록 함으로써 신용도를 높여 시장에서 소화될 수 있도록 한 신종 금융상품. 현재처럼 채권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B~BBB등급의 정크본드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프라이머리 CBO라고 해도 이를 인수할 투자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상황에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채권형 펀드다. 채권형 펀드란 정부가 은행 보험 등 금융기관에 일정액을 할당해서 만든, 그야말로 채권 투자용 펀드.
정부가 우선 목표로 정한 채권형 펀드의 조성 금액은 10조원. 그러나 8월17일 현재 절반이 조금 넘는 5조원 가량이 조성된 상태. 이종호 금융감독원 은행감독1국장은 “프라이머리 CBO 발행이 활성화되면 추석 전에 채권형 펀드 10조원 조성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금융계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는 총 27조9028억원 수준. 이 가운데 6월 말~12월 말에 만기도래하는 6대 이하 그룹의 채권이 9조원 정도. 채권형 펀드 조성 목표 10조원만 달성되면 이들 기업의 자금난이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회사채 만기가 도래한다 해도 이를 모두 상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회사의 신용도만 높다면 일부만 상환하고 나머지는 차환발행을 통해 연장받는다. 따라서 6대 이하 그룹들이 6월 말 이후 연말까지 만기도래하는 채권 가운데 5조, 6조원 정도를 프라이머리 CBO 발행을 통해 채권형 펀드가 소화하면 기업들은 3조, 4조원 정도만 상환해도 된다는 얘기다. 자금난이 한결 완화되는 셈이다.
여기에 올 5월 이후 시장에서 외면당했던 신용등급 BBB 이하의 비우량 회사채 발행이 성사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융계에 따르면 8월 중순 신세기통신 하나로통신 대한제당 코오롱 등 4개 기업이 자체 신용으로 모두 22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발행금리는 시장 기준인 A+ 등급 기업에 비해 1.7~2.7% 포인트 높은 수준. 시장 관계자들은 “채권형 펀드 조성과 비과세신탁 도입으로 투신권의 매수 여력이 살아난 게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용등급 BBB 이하 대부분의 기업들이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를 발행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 현재로선 이들은 프라이머리 CBO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정부 목표대로 채권형 펀드 10조원 조성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큰일. 물론 시장에서는 “작년 채권안정기금의 사례에서 보듯 정부의 ‘강요’로 목표는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 대형 보험사 사장은 “이제까지 할당액의 절반만 출자하고 ‘버티기’를 계속해 왔는데, 감독 당국의 ‘지시’를 언제까지 모른 체하기는 힘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채권형 펀드에 출자하게 된 금융기관들의 대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라이머리 CBO 발행조건을 까다롭게 하도록 발행 주간사측에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발행사 관계자는 “은행 등 투자기관들이 사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사려니까 자금유입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그러다 보니 프라이머리 CBO 발행이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 물량을 소화해줄 수 있도록 자금시장 물꼬를 트겠다는 당초 계획이 상당히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 외국인 투자가들의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도 부담이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외국인들은 채권형 펀드를 보고 과거 ‘관치금융’ 시대의 증시안정기금 등을 연상하고,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전형적인 아시아적 조치라고 지적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과 똑같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채권형 펀드가 정부의 자금시장 안정 대책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비과세 펀드 허용 등과 함께 ‘신규 채권 수요 진작’이라는 정부 대책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마디로 투신권에서 자금이 빠져나가자 정부가 ‘억지로’ 채권 수요를 만들어 채권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고육책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한 증권사 임원은 “은행 대출도 쉽지 않고, 증시는 증시대로 활력을 잃어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운 상황에 채권시장이 얼어붙어 차환발행이 잘 되지 않고 있으니 정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투신운용사 사장도 “정부 대책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고 인정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채권형 펀드를 ‘관치금융의 전형’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기업이 연쇄도산함으로써 부실채권이 양산되면 그 부담을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것은 금융기관인데도 이들은 이기주의에 젖어 채권형 펀드 출자를 꺼리는 등 시장을 아예 깨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위기 관리’를 위해 내놓은 대책이 먹혀들지 않으면 진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금융기관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그러나 위기관리를 명분으로 한 이런 대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올해는 채권형 펀드로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내년에는? 정부 기대대로 채권시장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내년 한해 동안 만기도래하는 회사채 물량이 57조8000억원대로 추산되므로 또 다른 채권형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결국 “작년의 채권안정기금이나 채권형 펀드는 현재 문제를 미래로 지연시키는 미봉책”(고려대 장하성 교수)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다면 근본대책은 없는가. 전문가들은 위기관리와 함께 구조개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삼성증권 김기현 연구위원은 “퇴출돼야 할 기업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금시장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고, 자금도 단기화하고 있다”면서 기업 구조조정의 가속화를 주문했다. E쪱미래에셋투신운용 김경록 대표도 “현재 채권시장은 기업을 좋은 기업과 안 좋은 기업으로 양분해 안 좋은 기업 채권은 무조건 사지 않는 분위기”라면서 “기업 내용이 좋지 않은 기업 중에서도 정말 퇴출돼야 할 기업을 가려내야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금융기관 규제완화 역시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정크본드 시장이 활성화돼 신용도 낮은 기업들의 회사채도 쉽게 소화되는 시장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 B씨는 “현재 채권시장이 죽게 된 직접적 원인은 회사채를 소화해줄 수 있는 투신사, 종금사, 은행 신탁계정에 돈이 들어오지 않아 회사채 매수 기반이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투신사 설립 규제를 완화해 정크본드에도 투자하는 투신사가 나타나도록 하면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들의 자금난이 한결 완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행법상 투신사 설립은 허가제로, 자본금 100억원 이상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나마도 IMF사태 이전에는 설립에 필요한 최소 자본금을 300억원으로 규정해놓았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정부는 고객 자산 보호 등을 위해 투신사의 최소 자본금 규정을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자본금이 많아도 고객 자산을 보호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최소 자본금을 투신사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널리스트 B씨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최소 자본금 규정 때문에 투신사를 설립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회사 내용은 좋은데 일시적인 유동성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눈에 보인다. 고객들의 돈을 이런 기업들의 회사채 중심으로 운용하면 얼마든지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고객들의 돈이 이런 기업들의 회사채에 몰리게 되고 결국은 금리도 낮아지면서 자금시장이 안정될 수 있다.”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 K씨는 “투신사 설립에 진입 규제를 둔 것은 결국 대한투신과 한국투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면서 “두 투신사는 고객의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에 새로운 투신사들이 나타나 고객을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씨는 “외국 투자가들은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투신사에 자본금 규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K씨는 또 감독 당국이 여전히 과거 관치시대의 행태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작년 말 금감원 직원들이 한 투자자문사에 들러 컴퓨터 Y2K 문제를 점검한다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투자자문사란 고객이 다른 증권사에 터놓은 계좌를 관리해주는 회사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다운돼도 전화와 팩스만 있으면 영업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런 회사에 와서 Y2K 운운하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시장전문가들은 위기관리를 위한 정부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 개입은 일시적이어야 하고, 시장안정을 위한 위기관리와 함께 구조개혁을 단호히 단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 상황은 안타깝게도 정부가 구조개혁은 미룬 채 위기관리에만 집착, 과거와 같은 ‘관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큰 위기를 키워가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 진념 경제팀이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까.
이를 포함해 8월 말까지 발행 예정된 프라이머리 CBO 규모는 모두 4조6000억~5조3000억원. LG투자증권 김상덕 팀장은 “금융기관들이 목표로 한 10조원 규모의 채권형 펀드 조성이 완료돼 프라이머리 CBO를 중심으로 운영하면 기업들의 자금난이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체 프라이머리 CBO가 무엇이기에 기업 자금난에 숨통을 터줄 수 있단 말인가.
현재 채권시장은 한마디로 ‘죽어 있다’. SK증권 최명의 상무는 “삼성 LG SK 롯데 그룹 계열사들, 그리고 다른 그룹의 경우 초우량 계열사 몇 곳 외에는 아무리 금리를 높게 준다고 해도 회사채가 소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상무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인 데다 IMF사태 이후 각 금융기관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면서 투기등급 이하 채권에 대해서는 아예 투자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어놓은 상태”라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시중에 돈이 남아돌고 있음에도 회사채 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라이머리 CBO란 기업이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 발행이 힘들 경우 여러 기업의 회사채를 한데 묶은 뒤 신용보증기관이 신용보증을 서주도록 함으로써 신용도를 높여 시장에서 소화될 수 있도록 한 신종 금융상품. 현재처럼 채권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B~BBB등급의 정크본드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프라이머리 CBO라고 해도 이를 인수할 투자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상황에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채권형 펀드다. 채권형 펀드란 정부가 은행 보험 등 금융기관에 일정액을 할당해서 만든, 그야말로 채권 투자용 펀드.
정부가 우선 목표로 정한 채권형 펀드의 조성 금액은 10조원. 그러나 8월17일 현재 절반이 조금 넘는 5조원 가량이 조성된 상태. 이종호 금융감독원 은행감독1국장은 “프라이머리 CBO 발행이 활성화되면 추석 전에 채권형 펀드 10조원 조성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금융계에 따르면 올해 말까지 만기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는 총 27조9028억원 수준. 이 가운데 6월 말~12월 말에 만기도래하는 6대 이하 그룹의 채권이 9조원 정도. 채권형 펀드 조성 목표 10조원만 달성되면 이들 기업의 자금난이 상당히 완화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회사채 만기가 도래한다 해도 이를 모두 상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회사의 신용도만 높다면 일부만 상환하고 나머지는 차환발행을 통해 연장받는다. 따라서 6대 이하 그룹들이 6월 말 이후 연말까지 만기도래하는 채권 가운데 5조, 6조원 정도를 프라이머리 CBO 발행을 통해 채권형 펀드가 소화하면 기업들은 3조, 4조원 정도만 상환해도 된다는 얘기다. 자금난이 한결 완화되는 셈이다.
여기에 올 5월 이후 시장에서 외면당했던 신용등급 BBB 이하의 비우량 회사채 발행이 성사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금융계에 따르면 8월 중순 신세기통신 하나로통신 대한제당 코오롱 등 4개 기업이 자체 신용으로 모두 22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발행금리는 시장 기준인 A+ 등급 기업에 비해 1.7~2.7% 포인트 높은 수준. 시장 관계자들은 “채권형 펀드 조성과 비과세신탁 도입으로 투신권의 매수 여력이 살아난 게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용등급 BBB 이하 대부분의 기업들이 자체 신용으로 회사채를 발행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 현재로선 이들은 프라이머리 CBO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정부 목표대로 채권형 펀드 10조원 조성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큰일. 물론 시장에서는 “작년 채권안정기금의 사례에서 보듯 정부의 ‘강요’로 목표는 달성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한 대형 보험사 사장은 “이제까지 할당액의 절반만 출자하고 ‘버티기’를 계속해 왔는데, 감독 당국의 ‘지시’를 언제까지 모른 체하기는 힘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채권형 펀드에 출자하게 된 금융기관들의 대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라이머리 CBO 발행조건을 까다롭게 하도록 발행 주간사측에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발행사 관계자는 “은행 등 투자기관들이 사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사려니까 자금유입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그러다 보니 프라이머리 CBO 발행이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신용도가 낮은 기업들의 회사채 만기 물량을 소화해줄 수 있도록 자금시장 물꼬를 트겠다는 당초 계획이 상당히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 외국인 투자가들의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도 부담이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외국인들은 채권형 펀드를 보고 과거 ‘관치금융’ 시대의 증시안정기금 등을 연상하고,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전형적인 아시아적 조치라고 지적한다”면서 “그런 점에서 한국은 일본과 똑같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물론 채권형 펀드가 정부의 자금시장 안정 대책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비과세 펀드 허용 등과 함께 ‘신규 채권 수요 진작’이라는 정부 대책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마디로 투신권에서 자금이 빠져나가자 정부가 ‘억지로’ 채권 수요를 만들어 채권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고육책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한 증권사 임원은 “은행 대출도 쉽지 않고, 증시는 증시대로 활력을 잃어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운 상황에 채권시장이 얼어붙어 차환발행이 잘 되지 않고 있으니 정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투신운용사 사장도 “정부 대책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고 인정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채권형 펀드를 ‘관치금융의 전형’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기업이 연쇄도산함으로써 부실채권이 양산되면 그 부담을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것은 금융기관인데도 이들은 이기주의에 젖어 채권형 펀드 출자를 꺼리는 등 시장을 아예 깨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위기 관리’를 위해 내놓은 대책이 먹혀들지 않으면 진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금융기관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그러나 위기관리를 명분으로 한 이런 대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올해는 채권형 펀드로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고 치자. 그럼 내년에는? 정부 기대대로 채권시장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내년 한해 동안 만기도래하는 회사채 물량이 57조8000억원대로 추산되므로 또 다른 채권형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결국 “작년의 채권안정기금이나 채권형 펀드는 현재 문제를 미래로 지연시키는 미봉책”(고려대 장하성 교수)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다면 근본대책은 없는가. 전문가들은 위기관리와 함께 구조개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삼성증권 김기현 연구위원은 “퇴출돼야 할 기업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금시장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고, 자금도 단기화하고 있다”면서 기업 구조조정의 가속화를 주문했다. E쪱미래에셋투신운용 김경록 대표도 “현재 채권시장은 기업을 좋은 기업과 안 좋은 기업으로 양분해 안 좋은 기업 채권은 무조건 사지 않는 분위기”라면서 “기업 내용이 좋지 않은 기업 중에서도 정말 퇴출돼야 할 기업을 가려내야 시장의 불확실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금융기관 규제완화 역시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정크본드 시장이 활성화돼 신용도 낮은 기업들의 회사채도 쉽게 소화되는 시장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 B씨는 “현재 채권시장이 죽게 된 직접적 원인은 회사채를 소화해줄 수 있는 투신사, 종금사, 은행 신탁계정에 돈이 들어오지 않아 회사채 매수 기반이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투신사 설립 규제를 완화해 정크본드에도 투자하는 투신사가 나타나도록 하면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들의 자금난이 한결 완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행법상 투신사 설립은 허가제로, 자본금 100억원 이상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나마도 IMF사태 이전에는 설립에 필요한 최소 자본금을 300억원으로 규정해놓았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정부는 고객 자산 보호 등을 위해 투신사의 최소 자본금 규정을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자본금이 많아도 고객 자산을 보호할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최소 자본금을 투신사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널리스트 B씨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최소 자본금 규정 때문에 투신사를 설립할 수 없다고 한탄한다.“회사 내용은 좋은데 일시적인 유동성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눈에 보인다. 고객들의 돈을 이런 기업들의 회사채 중심으로 운용하면 얼마든지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고객들의 돈이 이런 기업들의 회사채에 몰리게 되고 결국은 금리도 낮아지면서 자금시장이 안정될 수 있다.”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 K씨는 “투신사 설립에 진입 규제를 둔 것은 결국 대한투신과 한국투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면서 “두 투신사는 고객의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에 새로운 투신사들이 나타나 고객을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K씨는 “외국 투자가들은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투신사에 자본금 규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K씨는 또 감독 당국이 여전히 과거 관치시대의 행태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작년 말 금감원 직원들이 한 투자자문사에 들러 컴퓨터 Y2K 문제를 점검한다고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투자자문사란 고객이 다른 증권사에 터놓은 계좌를 관리해주는 회사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다운돼도 전화와 팩스만 있으면 영업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런 회사에 와서 Y2K 운운하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시장전문가들은 위기관리를 위한 정부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 개입은 일시적이어야 하고, 시장안정을 위한 위기관리와 함께 구조개혁을 단호히 단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 상황은 안타깝게도 정부가 구조개혁은 미룬 채 위기관리에만 집착, 과거와 같은 ‘관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큰 위기를 키워가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는 것. 진념 경제팀이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