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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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감별기까지 속는다

美달러·채권 표적 … 북한서 제작 ‘의혹’ 진짜 뺨치는 1백달러 ‘슈퍼노트’ 전세계 유통

  • 입력2006-05-19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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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폐 감별기까지 속는다
    미국 달러 중에서 최고액권은 10만달러다. 그외 1만달러와 5000달러, 500달러짜리 지폐를 발행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는다. 발행 장수가 워낙 적은데다 수집가들의 장롱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통되는 미국 지폐 중에서 최고액권은 100달러. 외국을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깜빡 속는 경우가 있다. 1만달러도 아니고 100만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귀국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1만원권을 확대한 ‘복돈’이 유행한 것처럼, 미국에서는 100만달러짜리 가짜 돈이 2달러짜리 관광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러한 지폐에는 ‘이 지폐는 가짜다. 유통될 수 없다’는 뜻으로 ‘NON NEGOTIABLE’ ‘NOT LEGAL TENDER’란 영문이 찍혀 있다. 진짜 지폐는 특수 종이와 잉크를 사용하나, 이 상품은 일반 종이에 보통 잉크로 인쇄돼 있다.

    그런데 개중에는 이 가짜 돈에서 ‘NON NEGOTIABLE’ 등의 영문을 지우고 어리숙한 한국인에게 “미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액권인데 싸게 주겠다”며 파는 사람이 있다. 지난 3월 한 한국인이 100만달러가 찍힌 이 관광 상품을 48장(액면가 4800만달러)이나 들고 서울경찰청을 찾아왔다. 외환은행에 감정해본 결과 당연히 ‘가짜’. 그제서야 이 한국인은 “1억원을 주고 한국인한테 샀다”며 억울해 했다.

    미국 재무성이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 가짜 채권에 속는 사람도 있다. 지난 3월12일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액면가 100만달러인 미국 채권 38장과 액면가가 500만달러인 미국 채권 10장 등 도합 4억3000만달러(4770억원)어치 채권을 유통시키려 한 이모씨(49)를 구속하고, 공범 정모씨(36)를 수배했다. 이 가짜 채권의 원산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이씨와 정씨 등은 97년 베이징에서 670만원을 주고 이 채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채권의 최초 소유자가 남겼다는 유언장과 은행 예수증서 등을 위조한 뒤 ‘봉’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걸려든 ‘봉’이 건설업체 대표인 김모씨(46). 이씨와 정씨 등은 김씨에게 이 채권을 감춰놓고 대신 컬러복사한 것을 보여주며 “한국 돈으로 4770억원에 해당하는 진짜 미국 채권을 갖고 있는데 1290억원에 팔겠다”고 유혹했다. 이들이 감춰놓은 가짜 채권은 전문가들 작품답게, 지나온 세월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적당히 탈색돼 있었다. 지질도 아주 좋아 보였다. 김씨가 ‘입질’하는 사이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채권시장에 심어둔 망원(정보원)을 통해 이러한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나섰다. 덕분에 김씨는 1290억원을 날리는 ‘봉’이 될 뻔한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수 있었다.



    가짜 미국 채권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는 것은 미국에도 고민거리다. 그래서 미 재무성은 인터넷을 통해 ‘미국 정부가 발행했다는 가짜 채권이 전세계에 유통되고 있으니 속지 마십시오’라는 홍보문을 대량으로 띄우고 있다. 그런데도 일확천금에 눈이 어두워지면 깜빡 속게 되는 것이다.

    간혹 진폐가 위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여름 서울 서초경찰서 박찬길경사는 1차대전 직후에 발행된 독일 마르크화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1차대전 패전후 들어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인적인 인플레로 유명했다. 그래서 1923년 독일 정부는 1조마르크를 1마르크로 하는 ‘어마어마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이전의 마르크화는 종잇값도 안나오는 쓰레기가 되었다.

    세계사 책을 뒤적거려본 사람에게 이러한 사실은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현실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된다. 범인들은 화폐개혁 이전의 마르크화를 들고 나왔다. 10만마르크권 18장과 50마르크권 1장으로, 도합 18만50마르크였다. 지금 유통되는 마르크화라면 원화로 10억원이 넘는 거액이지만, 당시의 가치로 따져본다면 1원도 되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 마르크화는 독일 정부에서 유통정지시킨 것이라 은행에서는 환전해 줄 수도 없다.

    범인들은 전문적으로 채권을 위조해서 유통시키던 자들이었다. 이들이 노린 ‘봉’은 나이 많은 사업가였다. 이 사업가는 1억원만 주면 단번에 10억원을 벌게 해주겠다는 꾐에 속아 ‘입질’을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그래서 서초경찰서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같이 가서 그들을 좀 만나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박경사를 포함한 강력반원 소속 다섯 명이 약속장소인 서울 전농동의 한 다방으로 나갔다.

    당시 다방에는 15명 정도의 손님이 있었는데, 경찰이 이 손님 전부가 공범자였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노인네를 맞이한 것은 세 사람이었다. 박경사를 포함한 형사들이 “일단 경찰서로 가자”고 하자 이들은 “내가 누군데” 하며 완강히 저항했다. 이들은 경찰이 가스총을 뽑아들고 위협을 가하자 비로소 따라나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이 타고온 자동차 안에는 공기총도 있었다. 그들도 경찰만큼이나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짜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는 마르크화 사건은 피해자 없이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범인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사기 미수’. 사기 미수죄에 대해서는 최고 징역 10년형을 부과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징역 5년형 이하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사건처럼 피해자가 실제 피해를 보지 않으면 범인들은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더구나 이들은 통화정지된 ‘마르크화’를 갖고 범행을 계획했으니(현재로서는 진짜 돈이 아니므로)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기소되지도 않는다.

    이 위조범들이 사실상 범죄단체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형법에서는 폭력사건일 때만 범죄단체구성을 죄로 인정한다. 위조 범죄단체에 대해서는 범죄단체 구성죄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 법률이 ‘솜방망이’다 보니 위조범들은 ‘전과만 올라가지 빵에서 썩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

    진짜지만 가짜나 다름 없는 마르크화, 미국 정부 발행의 고액 가짜 채권, 그리고 100만달러짜리 관광상품에 속거나 속을 뻔하는 사람은 그래도 ‘주머니에 넣고 쩔렁거릴 돈이 있는’ 갑부들이다. 하지만 점심값이 아까워 값싼 데를 찾아 이 음식점 저 음식점을 기웃거리는 ‘새가슴’의 월급쟁이들도 위조 지폐에 깜빡 속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달러를 비롯한 외국 화폐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위폐범들은 1달러 진폐에 인쇄된 1자를 긁어내고 50이나100이라는 숫자를 써넣거나 붙인다. ‘원 달러’(ONE DOLLAR)라는 영문은 ‘피프티 달러스’(FIFTY DOLLARS)나 ‘원 헌드레드 달러스’(ONE HUNDRED DOLLARS)로 고쳐 버린다. 1달러 지폐 앞면에 있는 초상화나 뒷면에 있는 건물 그림은 바꾸기 어려워 그대로 두는데도, 미국 화폐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은 깜빡 속는 것이다.

    진폐 위에 찍힌 숫자와 문자만 바꾼 가짜 화폐를 변조화폐라고 한다. 변조화폐는 각 은행에 설치된 위조지폐 감별기를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다. 위조지폐 감별기는 지질만으로 진폐와 위폐를 구분해내므로 진폐를 변조한 변조화폐는 잡아낼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 손과 눈은 수상한 점을 찾아낼 수가 있다. 변조화폐는 칼끝으로 숫자와 문자를 벗겨내고 숫자와 문자를 써넣었거나 오려붙였으므로 만져보면 느낌이 다르다. 더구나 초상화와 건물까지는 바꾸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 금방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달러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깜빡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다.

    변조화폐나 위조 채권을 만드는 사람들이 끼치는 피해 범위는 그래도 작은 편이다. 진짜 큰 문제는 요판(凹板)을 구입해서 전문적으로 위조지폐를 찍는 자들이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르므로 한국에서만 유통되는 원화 위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들이 찍어내는 것은 ‘슈퍼노트’로 불리는 100달러짜리 지폐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위조 원화는 대부분 컬러복사하거나 스캐너로 주사(走査)한 것들이라 색상이 조악하고 지질 또한 진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프로 위폐범들이 요판 인쇄한 슈퍼노트는 워낙 정교해서 사진으로는 진폐와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가 없다.

    슈퍼노트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원가는 인건비를 포함해 대략 30달러일 것으로 추산된다. 세 곱이 남는 장사이므로 프로 위조범들은 목숨을 걸고 슈퍼노트 제작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러한 슈퍼노트는 보따리 장수나 국제범죄 조직을 통해 전세계로 유통된다. 세계 시장에서 달러 다음으로 많이 유통되는 것은 일본의 엔화인데, 기이하게도 엔화는 거의 위조되지 않고 있다. 이는 고액권인 1만엔이 워낙 고급 종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프로 위조범이라고 해도 1만엔짜리에 쓰이는 것과 흡사한 종이를 구할 수 없기에 엔화는 컬러 복사나 스캐너를 이용한 주사 외에는 위조가 거의 없다.

    요판은 워낙 고가인데다 국가 기관이 아니고는 사실상 구입할 수가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수사기관들은 슈퍼노트는 캄보디아와 중국 북한에서 주로 생산되며, 이들 나라의 정부 조직이 슈퍼노트 제작에 관여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지난 98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북한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 길재경이 슈퍼노트 3만달러(약 3300만원)를 환전하려다 검거되었다. 96년 12월 루마니아에서는 루마니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김철호참사가 슈퍼노트 5만달러(약 5500만원)를 유통시키려다 검거된 적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자국 화폐 인쇄를 위해 구입한 요판을 슈퍼노트 제작용으로도 사용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워낙 예민한 문제라서 그 어떤 국가의 수사기관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위-변조 화폐에 가장 잘 속는 사람은 중국-러시아 보따리 장수를 상대하는 서울 동대문시장과 부산 초량동 시장의 상인, 그리고 암달러상일 것이다. 상인들은 환전시의 수수료(총 금액의 1∼1.5%)가 아까워 달러를 그냥 유통시키고 있다. 그러다 이 달러를 들고 마지막으로 은행을 찾아간 사람이 돈을 몽땅 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를 예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액면가보다 싼 가격에 외국 화폐나 채권을 주겠다고 하는 자들은 위-변조범들이므로 무조건 접촉을 피해야 한다. 신용카드나 여행자수표를 이용한 해외거래를 늘리는 것도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다.

    척보면 아는 ‘적집게 감별사’

    30여년 한우물…신지식인으로 꼽혀


    국내 최고의 위-면조 외화 감별사는 외환은행 본점 외환업무팀의 서태식과장(57)이다. '신지식인'으로 꼽혀 청와대 만찬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그는, 69년 임시직원으로 외환은행에 들어오면서부터 위-변조 외화 감별 업무를 전담했다.그가 위-변조 달러화 감별 업무를 처음 접한 것은 카투사 경리병으로 미 7사단에 배치된 때였다. 미군 경리 장교는 감별기를 통해서만 위조 달러를 찾아내는데, 위조 달러의 특징에 대해 교육받은 그는 달러 뭉치를 세는 와중에도 척척 위조 달러를 뽑아 올렸다. 이것이 인연이 돼 위-변조 외화 감별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슈퍼노트를 제작하는 사실이 확인되자 요즘은 국가정보원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정원이 구축한 위-변조 달러에 관한 자료도 상당부분은 서과장이 제공한 것이다. 국정원이나 경찰서에 의심나는 외화가 있을 때는 서과장에게 달려와 감정을 의뢰한다. 평생 한 우물만 파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서 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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