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의 첫 선거인 4·13총선 결과를 읽어내려는 많은 정치분석가들이 내놓는 가장 큰 화두는 아마 ‘3김시대의 청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민련의 침몰과 김종필명예총재(JP)의 추락은 그 확실한 징후인 셈이다.
2000년 벽두에 시민단체들은 JP에게 ‘지나간 천년의 구시대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여 정계은퇴를 ‘권고’했다. 그 여파였을까.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JP에게 등을 돌렸다. 50석의 당당한 제3당이던 자민련이 교섭단체도 못만드는 17석의 미니정당으로 전락했고, ‘JP 맨’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비례대표라는 안전망에 있던 JP만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이같은 무참한 결과는 JP와 자민련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일 수 있다. ‘보수’라는 이름 아래 변화를 수용하길 거부했고 “이런 버릇없는 놈들”이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젊은 것들’이 JP에게 변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미 수십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묵은 상처에다 아예 ‘퇴물’이라는 불도장을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JP는 저항했다. 김대중대통령의 측근들이 주도한 ‘음모극’이라고. 시민단체라는 홍위병을 내세워 ‘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문화혁명 논리로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며, 자신은 배신당했다며 동정을 사려 했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JP 말이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던 충청도 사람들마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그런 민심이 바로 이번 선거결과로 나타났고 JP로서는 40년 정치역정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과거에도 위기는 많았다. 박정희정권에서 수차례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 외유’에 나서야 했고 80년 신군부에 의해 부패인사로 낙인찍혀 정치규제에 묶이는 수모도 당했지만 그에겐 충청도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충청도 사람들 상당수가 JP 대신 이인제(李仁濟)라는 새로운 ‘대안’에 표를 준 것이다.
JP는 선거 직전까지도 이런 분위기를 믿지 않았다. 선거 전날인 4월12일 충청권을 헬기로 순회하던 JP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도 “적어도 지역구에서만 35석 안팎은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늘상 하던 우스갯소리도 잊지 않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저 ‘몰러유’ 하다가 답답해서 발길을 돌릴 때 쯤에야 ‘근디, 그 표가 어디 가남유’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충청도는 까봐야 안다”고.
그러나 참담한 결과가 나온 13일, JP의 충격은 컸다. JP는 다음날 새벽까지 2층 침실에서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설마 설마 하면서. 하지만 이내 뭔지 모를 분노에 사로잡혔고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부인 박영옥여사가 위로의 말을 하려 해도 “시끄러”라고 소리를 질러 말조차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과가 확실해진 14일 새벽 3시가 넘어 JP는 일부 당선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고했다. 일간 한번 보자”고. 특히 강창희의원에겐 “이거 엉망진창이 됐구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JP는 청구동 자택 문을 걸어잠그고 2층 침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15일 이한동총재를 비롯한 당직자 7명이 들이닥쳤지만 파자마 바람으로 이들을 맞았다. 파자마 차림은 앞으로 집 밖에 나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시위’로 해석됐다. 위기가 닥치면 항상 그랬듯이 JP는 칩거하면서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자 측근들 사이에선 즉각 JP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번쯤 JP가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자민련이 살아난다”고 했다. JP의 정계은퇴나 2선후퇴 가능성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하지만 JP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한번도 자신을 완전히 버려본 적이 없다. 굴곡 많은 역정의 삶이었다지만 권력에 의한 직접적 위해(危害)에 직면해본 적이 없고 칼끝이 다가오면 예민한 감각으로 서둘러 몸을 낮췄다. ‘정면돌파’라느니 하는 단어는 JP의 사전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JP는 16일 한가롭게도 측근들과 서울 근교로 나가 골프를 즐겼다. ‘도둑골프’를 즐기려다 사진기자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JP의 외출이 알려지면서 청구동 골목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JP의 귀가를 기다리자 JP는 결국 ‘장기외박’을 하면서까지 외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상심(傷心)의 시간은 이제 끝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측근들은 새삼 강조한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충청도 사람들이 ‘아뿔사, 우리가 JP를 잠시 잊었구나’라며 후회하고 있다. 충청권 사람들은 항상 일 저질러 놓고 한발짝 늦게 반성한다”고. 그러면서 “JP가 이렇게 맥없이 물러난다면 지난 40년간의 JP는 뭐가 되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JP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까진 시간이 꽤 필요할 듯하다. 자민련이 당선자 영입을 통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면 유유자적하며 캐스팅보트 역할을 즐길 수 있겠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백기투항’이냐, ‘공중분해’냐의 갈림길에 선다 해도 자민련은 여전히 값 나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물론 JP가 당선자 17명을 흔들림없이 지켜낸다는 전제 아래서다.
결국 당분간 JP에게 남은 일은 자기 식구를 온전히 보전하면서 기다리는 것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2000년 벽두에 시민단체들은 JP에게 ‘지나간 천년의 구시대 인물’이라는 딱지를 붙여 정계은퇴를 ‘권고’했다. 그 여파였을까.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JP에게 등을 돌렸다. 50석의 당당한 제3당이던 자민련이 교섭단체도 못만드는 17석의 미니정당으로 전락했고, ‘JP 맨’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비례대표라는 안전망에 있던 JP만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이같은 무참한 결과는 JP와 자민련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일 수 있다. ‘보수’라는 이름 아래 변화를 수용하길 거부했고 “이런 버릇없는 놈들”이라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젊은 것들’이 JP에게 변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미 수십년 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묵은 상처에다 아예 ‘퇴물’이라는 불도장을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JP는 저항했다. 김대중대통령의 측근들이 주도한 ‘음모극’이라고. 시민단체라는 홍위병을 내세워 ‘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에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문화혁명 논리로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며, 자신은 배신당했다며 동정을 사려 했다.
하지만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JP 말이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던 충청도 사람들마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그런 민심이 바로 이번 선거결과로 나타났고 JP로서는 40년 정치역정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과거에도 위기는 많았다. 박정희정권에서 수차례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 외유’에 나서야 했고 80년 신군부에 의해 부패인사로 낙인찍혀 정치규제에 묶이는 수모도 당했지만 그에겐 충청도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충청도 사람들 상당수가 JP 대신 이인제(李仁濟)라는 새로운 ‘대안’에 표를 준 것이다.
JP는 선거 직전까지도 이런 분위기를 믿지 않았다. 선거 전날인 4월12일 충청권을 헬기로 순회하던 JP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도 “적어도 지역구에서만 35석 안팎은 된다”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늘상 하던 우스갯소리도 잊지 않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저 ‘몰러유’ 하다가 답답해서 발길을 돌릴 때 쯤에야 ‘근디, 그 표가 어디 가남유’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충청도는 까봐야 안다”고.
그러나 참담한 결과가 나온 13일, JP의 충격은 컸다. JP는 다음날 새벽까지 2층 침실에서 TV 앞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설마 설마 하면서. 하지만 이내 뭔지 모를 분노에 사로잡혔고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부인 박영옥여사가 위로의 말을 하려 해도 “시끄러”라고 소리를 질러 말조차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과가 확실해진 14일 새벽 3시가 넘어 JP는 일부 당선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고했다. 일간 한번 보자”고. 특히 강창희의원에겐 “이거 엉망진창이 됐구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JP는 청구동 자택 문을 걸어잠그고 2층 침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기야 15일 이한동총재를 비롯한 당직자 7명이 들이닥쳤지만 파자마 바람으로 이들을 맞았다. 파자마 차림은 앞으로 집 밖에 나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시위’로 해석됐다. 위기가 닥치면 항상 그랬듯이 JP는 칩거하면서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러자 측근들 사이에선 즉각 JP의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번쯤 JP가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 자민련이 살아난다”고 했다. JP의 정계은퇴나 2선후퇴 가능성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하지만 JP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한번도 자신을 완전히 버려본 적이 없다. 굴곡 많은 역정의 삶이었다지만 권력에 의한 직접적 위해(危害)에 직면해본 적이 없고 칼끝이 다가오면 예민한 감각으로 서둘러 몸을 낮췄다. ‘정면돌파’라느니 하는 단어는 JP의 사전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JP는 16일 한가롭게도 측근들과 서울 근교로 나가 골프를 즐겼다. ‘도둑골프’를 즐기려다 사진기자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JP의 외출이 알려지면서 청구동 골목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JP의 귀가를 기다리자 JP는 결국 ‘장기외박’을 하면서까지 외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상심(傷心)의 시간은 이제 끝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제 측근들은 새삼 강조한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야 충청도 사람들이 ‘아뿔사, 우리가 JP를 잠시 잊었구나’라며 후회하고 있다. 충청권 사람들은 항상 일 저질러 놓고 한발짝 늦게 반성한다”고. 그러면서 “JP가 이렇게 맥없이 물러난다면 지난 40년간의 JP는 뭐가 되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JP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까진 시간이 꽤 필요할 듯하다. 자민련이 당선자 영입을 통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면 유유자적하며 캐스팅보트 역할을 즐길 수 있겠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백기투항’이냐, ‘공중분해’냐의 갈림길에 선다 해도 자민련은 여전히 값 나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물론 JP가 당선자 17명을 흔들림없이 지켜낸다는 전제 아래서다.
결국 당분간 JP에게 남은 일은 자기 식구를 온전히 보전하면서 기다리는 것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