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 김종필명예총재(JP)가 당으로 복귀하기 일주일 전인 지난 1월4일. 재향군인회 회장단을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 초청, 고별 오찬을 내는 자리에서 JP는 불쑥 김대중대통령의 ‘사상문제’를 거론했다. JP는 “대통령은 국가보안법 개정문제와 관련해 지극히 건전한 판단을 갖고 있다. 대통령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DJ의 사상이 의심스럽지 않다는 일종의 변론이지만 어쩌면 ‘사상감별사’, 아니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중세유럽의 ‘종교재판관’과도 같은 어투였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DJ의 시각을 설명했다. “김대통령이 처음엔, 그러니까 야당총재 시절엔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했어요. 하지만 취임 후엔 ‘없애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인권 침해나 권한 남용 부분에 대해 개정을 얘기했고 요즘엔 아예 얘기를 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DJ의 시각 변화엔 자신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은연 중 강조한 대목이었다.
98년 2월 ‘DJP 공동정부’가 출범한 이래 두 사람은 ‘국무총리의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 형식으로 매주 만났다. 물론 건너뛰는 경우도 많았고 지난해 하반기 내각제유보 파동 이후엔 몇 달 동안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짧게는 10여분, 길게는 한 시간이 넘게 매주 만났지만 두 사람의 대화내용은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JP가 “알아도 모르는 체 해야 하는 ‘델리키트’(delicate)한 자리가 총리직” 이라며 일체 함구한 때문이다. 하지만 JP가 총리직을 그만두면서 이렇게 두 사람간의 대화내용 중 일부를 군(軍) 선후배들에게 넌지시 알려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DJ의 ‘햇볕정책’에는 JP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원조보수 JP’라는 방패막이가 있었기에 그동안 숱한 색깔시비에 시달렸던 DJ로서도 자칫 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소리까지 들었을지 모를 ‘햇볕정책’을 흔들림 없이 고수해온 것이다.
하지만 JP로서도 무조건 DJ의 뜻을 수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선 주례보고 등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JP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했다는 주장이다.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행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JP지만 유독 대북관계 등에 대해선 DJ에게 ‘너무 앞서나가선 안된다’는 점을 밝혀왔던 것.
그렇게 나름대로 DJ의 ‘좌경화’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하며 DJ를 측면에서 엄호해준 JP였지만 당 복귀 이후 시민단체의 ‘준동’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더 이상 ‘DJ 보호’를 거부했다. 총선시민연대가 1월24일 JP를 공천부적격자 명단에 포함, ‘명예로운 정계은퇴’를 권고한 이틀 뒤 JP는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DJ를 두고 ‘진보주의자’로 규정했다. ‘시민단체와 여권핵심의 커넥션’ 의혹을 제기한 직후였다.
JP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기에는 걱정했던 정도의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것 보세요. 시민연대가 하는 것도 존중한다고 하고…. 분명히 실정법 위반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런 걸 존중한다고 하고, 그러니 나는 일말의 의문을 안가질 수 없어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 JP로선 결국 DJ와의 대결노선을 둘 사이의 ‘색깔’ 차이에서 찾은 것이다. JP는 당시 정국을 중국의 피비린내 났던 문화혁명기에 빗대고 시민단체를 마오쩌둥(毛澤東)의 ‘홍위병’으로 비유했다. ‘DJ를 에워싼 진보세력의 JP 죽이기’ 시나리오. 충청권 텃밭에서 이보다 더 분명하고 잘 먹혀들 ‘그림’이 있을까. ‘정치 9단’다운 생존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개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천파문으로 신당이 태동하는 급박한 정국에서 JP는 급기야 2월24일 이한동총재를 내세워 ‘야당’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 2년3개월 동안 유지돼온 ‘2여 공조’의 공식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라섬’은 어쩌면 태생부터 달랐던 두 사람이 어색하게 손을 잡고 출발했던 시점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야당으로 권력의 무시와 핍박을 당하며 재야인사들과 함께 살아온 DJ다. 반면 JP는 평생을 ‘권력의 2인자’로, 기득권층과 함께 살아온 인물이다. 때문에 이들의 연대는 늘 ‘한 지붕 두 가족’의 ‘불안한 동거’였고 크고 작은 마찰과 파열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각제 연기 파동과 2여 합당의 무산은 그 ‘예고편’이었다.
특히 지난해 말 2여 합당이 끝내 무산된 이후 JP는 진작부터 ‘갈라서기’를 준비해온 듯하다. 공식적으로 ‘합당’이라는 말 자체도 꺼내본 적이 없다는 JP지만 내심 JP는 2여 합당을 무척 기대해왔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 다만 당내의 반발 등 여건이 좋지 않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합당논의 과정에서 DJ에 대한 JP의 실망과 불신이 합당 불발로 이어졌다는 것.
당시 협상라인에 있던 JP 측근의 증언. “간접적으로 합당후 ‘JP 총재’를 제의해 왔으면서도 한동안 소식이 끊겼고 일각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이랬다. 민주당 고위당직자가 DJ에게 ‘DJ 명예총재, JP 총재’안을 보고했더니 DJ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는 것이다. JP로선 DJ가 합당할 생각이 없는 걸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 얘기가 있을 즈음 청와대 수석과 민주당 당직에 재야인사가 배치됐다. 그러니 JP로선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냐.”
합당 물건너간 뒤 결별 결심
어쨌든 JP와 자민련은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DJ 때리기’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듯하다. 그래서 야당 선언후 민주당과 청와대 문제라면 사사건건 쌍심지를 켜고 공세를 펴고 있다. 그러나 자민련의 ‘야당선언’은 여전히 ‘위장이혼’으로 인식되고 있어 ‘곁방살이’ 이미지를 벗어내기는 그렇게 쉽지 않을 전망이다.
더욱이 총선 이후 정국을 내다봐도 JP가 DJ와 완전 절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JP가 총선후 활용할 만능카드는 내각제. 그렇다면 JP로선 이미 내각제개헌을 약속했고 “약속은 살아 있다”고 누차 강조해온 DJ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전략적 동지’이기 때문이다. DJ는 2월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지금 당장은 선거 때문에 그런다고 보지만 내 입장에서 공동정부를 깰 생각이 전혀 없으며 공조를 바꿀 생각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DJ의 시각을 설명했다. “김대통령이 처음엔, 그러니까 야당총재 시절엔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했어요. 하지만 취임 후엔 ‘없애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인권 침해나 권한 남용 부분에 대해 개정을 얘기했고 요즘엔 아예 얘기를 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DJ의 시각 변화엔 자신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은연 중 강조한 대목이었다.
98년 2월 ‘DJP 공동정부’가 출범한 이래 두 사람은 ‘국무총리의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 형식으로 매주 만났다. 물론 건너뛰는 경우도 많았고 지난해 하반기 내각제유보 파동 이후엔 몇 달 동안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짧게는 10여분, 길게는 한 시간이 넘게 매주 만났지만 두 사람의 대화내용은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JP가 “알아도 모르는 체 해야 하는 ‘델리키트’(delicate)한 자리가 총리직” 이라며 일체 함구한 때문이다. 하지만 JP가 총리직을 그만두면서 이렇게 두 사람간의 대화내용 중 일부를 군(軍) 선후배들에게 넌지시 알려준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DJ의 ‘햇볕정책’에는 JP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원조보수 JP’라는 방패막이가 있었기에 그동안 숱한 색깔시비에 시달렸던 DJ로서도 자칫 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소리까지 들었을지 모를 ‘햇볕정책’을 흔들림 없이 고수해온 것이다.
하지만 JP로서도 무조건 DJ의 뜻을 수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선 주례보고 등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JP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했다는 주장이다.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행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JP지만 유독 대북관계 등에 대해선 DJ에게 ‘너무 앞서나가선 안된다’는 점을 밝혀왔던 것.
그렇게 나름대로 DJ의 ‘좌경화’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하며 DJ를 측면에서 엄호해준 JP였지만 당 복귀 이후 시민단체의 ‘준동’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더 이상 ‘DJ 보호’를 거부했다. 총선시민연대가 1월24일 JP를 공천부적격자 명단에 포함, ‘명예로운 정계은퇴’를 권고한 이틀 뒤 JP는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DJ를 두고 ‘진보주의자’로 규정했다. ‘시민단체와 여권핵심의 커넥션’ 의혹을 제기한 직후였다.
JP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기에는 걱정했던 정도의 성격의 소유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것 보세요. 시민연대가 하는 것도 존중한다고 하고…. 분명히 실정법 위반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런 걸 존중한다고 하고, 그러니 나는 일말의 의문을 안가질 수 없어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 JP로선 결국 DJ와의 대결노선을 둘 사이의 ‘색깔’ 차이에서 찾은 것이다. JP는 당시 정국을 중국의 피비린내 났던 문화혁명기에 빗대고 시민단체를 마오쩌둥(毛澤東)의 ‘홍위병’으로 비유했다. ‘DJ를 에워싼 진보세력의 JP 죽이기’ 시나리오. 충청권 텃밭에서 이보다 더 분명하고 잘 먹혀들 ‘그림’이 있을까. ‘정치 9단’다운 생존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개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공천파문으로 신당이 태동하는 급박한 정국에서 JP는 급기야 2월24일 이한동총재를 내세워 ‘야당’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지난 2년3개월 동안 유지돼온 ‘2여 공조’의 공식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라섬’은 어쩌면 태생부터 달랐던 두 사람이 어색하게 손을 잡고 출발했던 시점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야당으로 권력의 무시와 핍박을 당하며 재야인사들과 함께 살아온 DJ다. 반면 JP는 평생을 ‘권력의 2인자’로, 기득권층과 함께 살아온 인물이다. 때문에 이들의 연대는 늘 ‘한 지붕 두 가족’의 ‘불안한 동거’였고 크고 작은 마찰과 파열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각제 연기 파동과 2여 합당의 무산은 그 ‘예고편’이었다.
특히 지난해 말 2여 합당이 끝내 무산된 이후 JP는 진작부터 ‘갈라서기’를 준비해온 듯하다. 공식적으로 ‘합당’이라는 말 자체도 꺼내본 적이 없다는 JP지만 내심 JP는 2여 합당을 무척 기대해왔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 다만 당내의 반발 등 여건이 좋지 않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합당논의 과정에서 DJ에 대한 JP의 실망과 불신이 합당 불발로 이어졌다는 것.
당시 협상라인에 있던 JP 측근의 증언. “간접적으로 합당후 ‘JP 총재’를 제의해 왔으면서도 한동안 소식이 끊겼고 일각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이랬다. 민주당 고위당직자가 DJ에게 ‘DJ 명예총재, JP 총재’안을 보고했더니 DJ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는 것이다. JP로선 DJ가 합당할 생각이 없는 걸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 얘기가 있을 즈음 청와대 수석과 민주당 당직에 재야인사가 배치됐다. 그러니 JP로선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냐.”
합당 물건너간 뒤 결별 결심
어쨌든 JP와 자민련은 이번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DJ 때리기’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 듯하다. 그래서 야당 선언후 민주당과 청와대 문제라면 사사건건 쌍심지를 켜고 공세를 펴고 있다. 그러나 자민련의 ‘야당선언’은 여전히 ‘위장이혼’으로 인식되고 있어 ‘곁방살이’ 이미지를 벗어내기는 그렇게 쉽지 않을 전망이다.
더욱이 총선 이후 정국을 내다봐도 JP가 DJ와 완전 절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JP가 총선후 활용할 만능카드는 내각제. 그렇다면 JP로선 이미 내각제개헌을 약속했고 “약속은 살아 있다”고 누차 강조해온 DJ는 ‘미워도 다시 한 번’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전략적 동지’이기 때문이다. DJ는 2월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지금 당장은 선거 때문에 그런다고 보지만 내 입장에서 공동정부를 깰 생각이 전혀 없으며 공조를 바꿀 생각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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