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나라에서 예술가들이 유학한다고 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꼽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뉴욕으로 간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심지어 요리까지 모든 장르의 예술인들이 뉴욕행 비행기를 탄다. 이제 뉴욕은 미국의 한 지역이 아니라 독립된 ‘예술가들의 연합국’을 의미하는 듯하다.
지난 2월9일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린 구겐하임미술관은 이같은 한국 예술인들의 뉴욕붐을 실감하게 했다. 미술관은 제2의 백남준을 꿈꾸는 한국인 예술가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한 뉴욕 발행 한국신문에 따르면 현대미술의 메카로 알려진 소호와 첼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미술작가가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명문 프랫 인스티튜트에 재학중인 학생에서 뉴욕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은 중견작가까지, 선댄스영화제에 진출한 젊은 영화감독에서 예순살이 넘은 다큐멘터리 작가까지, 뉴욕의 다양한 색깔 중 하나가 한국 예술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뉴욕에 있으면 전세계 예술의 가장 새로운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죽어라고 해야 겨우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뉴욕 첼시의 화랑에서 전속 작가로 활동하는 이상남씨의 말이다. 현재 백남준과 함께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새 천년의 지평전’(3월5일까지)을 전시 중인 그는 나무조각 그림의 강익중, 3회 광주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인 바이런 김 등과 함께 뉴욕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한국 작가로 꼽힌다. 그의 회화는 우아한 수학적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그는 한국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재치있게 미국 모더니즘의 본질에 접근한 작가다.
78년 동아미술대전에서 수상, 주목받았으나 사회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정보기관의 간섭에 시달리다 도미한 변종곤씨도 현재 뉴욕에서 자주 전시를 여는 중견 한국인 작가. “쓰던 물감 하나 들고” 뉴욕으로 온 그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길거리에서 주운 폐품 등을 이용하는 오브제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칼날 같은 시선으로 미국에 비판적인 주제를 담아 현지에서도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역시 뉴욕이 주는 긴장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 가면 동료작가 중 이미 정상에 왔다는 자만심에 배가 나와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뉴욕에 있으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죠.”
이러한 압박감을 남성들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는 한국인 여성 작가들을 소호에서 만난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조숙진과 박유아씨.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몇 차례 전시를 가졌지만 서울보다는 뉴욕에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임을 그들의 작업실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동네 철거현장에서 나온 조악한 나무판 등을 직접 끌어다 스펙터클한 조형물로 엮는 조숙진씨나 종이공장에서 펄프를 퍼다 크레인에 매달려 작품을 만드는 박유아씨의 힘은 바로 뉴욕의 ‘기’와 맞서면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편 뉴욕 독립영화계에 진출하는 한국 영화인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젊은 한국 영화감독들이 독립영화인들의 꿈으로 불리는 선댄스영화제에 잇따라 초대받는 등 성과도 뚜렷해졌다.
미라 소르비노, 김혜수 등이 함께 출연한 영화 ‘투 타이어드 투 다이’의 진원석, 98년 ‘미스 월요일’로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벤슨 리, 2000년 선댄스영화제 진출로 화제가 된 ‘동화’의 교포감독 이지호 등이 그들이다. 대개 교포 1.5세 혹은 2세인 이들의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무게 중심이 놓인다.
“영화를 하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는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는 점 때문일 겁니다. 뭔가 표현하려는 욕구가 영화를 만들게 했으니까요.”(벤슨 리)
벤슨 리의 첫 번째 영화 ‘미스 월요일’은 거식증을 통해 성공의 이면을 그린 영화. 한국말은 서투르지만 백제, 화랑제도 등 한국 감독들 사이에선 ‘인기 없는’ 소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그는 다음 작품으로 교포들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소울 서칭’을 제작할 계획이다.
지난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김대실감독은 유학 1세대로 미국에서 학자의 길을 걷다 뒤늦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했다. 뉴욕 예술위원회 미디어 프로그램 디렉터로 백남준을 후원하기도 했던 김감독은 “사회적 약자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 ‘침묵의 소리’는 한국인 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동명의 책으로도 출판됐다. 또한 그가 연출한 영화 5편 중 4편은 공영방송 PBS 전파를 탔다.
“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편이었고 미국 남자와 결혼해 살지만 한국인도 서양인도 아닙니다. 한국에 뭔가 빚진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영화를 만듭니다.”
뉴욕에서 만난 한국인 작가들은 뛰어난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던 장벽을 만나게 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뉴욕에 남아 있는 것은 무모할 정도로 실험적이고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이 숨쉴 수 있는 제도와 공간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관(MOMA)이나 링컨센터는 독립영화에 상영의 기회를 제공해 명성을 얻고 있으며 소호의 ‘안젤리카’처럼 비상업적인 영화를 상영하는 복합상영관도 있다. 또한 한국의 상업화랑과는 달리 “뉴욕의 상업화랑이야말로 가장 첨단의 양상이 드러나는 곳”(이상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뉴욕에서 성공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새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주는 곳이다. 대신 새롭지 않고, 그래서 팔리지 않으면 예외없이 사라진다. 소호의 대표적 전시공간 중 하나였던 소호 구겐하임 1층을 최근 패션숍인 프라다가 차지한 사실이 작가들에겐 하나의 경고성 에피소드로 회자되고 있다.
프랫 인스티튜트를 나와 뉴욕에서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정신영씨는 “새로운 것을 너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함정도 많다. 계속 긴장하지 않으면 자신은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의 장점은 현대의 예술가에게 마케팅을 가르치고 그 기회를 비교적 공평하게 제공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호와 첼시에만 비영리로 운영되는 전시공간이 20개 이상 된다. “크고 작은 영화사들이 매일 문을 닫고 열며”(벤슨 리) IFFM처럼 유명한 독립영화 시장이 열려 저예산 감독들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어 윗치’같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전세계적 영화마케팅으로 이어주는 곳도 뉴욕의 독립영화계다.
그러므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세계 시장의 마케팅에서 승부를 내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게 작가들의 말이기도 하다.
소호에서 한국 작가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 사이에 집단적-개인적 교류는 거의 없다고 한다. 한 작가는 “뉴욕에선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고도 했다.
“한국인이라고 작가들이나 감독들을 따로 만나진 않아요. 그러나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겠다는 정신을 가진 후배들이 있다는 느낌, 그들과 어두운 골목을 같이 헤매며 싸우고 있다는 사실로 뿌듯한 곳이 뉴욕입니다.”(김대실감독)
지난 2월9일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린 구겐하임미술관은 이같은 한국 예술인들의 뉴욕붐을 실감하게 했다. 미술관은 제2의 백남준을 꿈꾸는 한국인 예술가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한 뉴욕 발행 한국신문에 따르면 현대미술의 메카로 알려진 소호와 첼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미술작가가 2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명문 프랫 인스티튜트에 재학중인 학생에서 뉴욕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은 중견작가까지, 선댄스영화제에 진출한 젊은 영화감독에서 예순살이 넘은 다큐멘터리 작가까지, 뉴욕의 다양한 색깔 중 하나가 한국 예술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뉴욕에 있으면 전세계 예술의 가장 새로운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죽어라고 해야 겨우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뉴욕 첼시의 화랑에서 전속 작가로 활동하는 이상남씨의 말이다. 현재 백남준과 함께 서울의 현대화랑에서 ‘새 천년의 지평전’(3월5일까지)을 전시 중인 그는 나무조각 그림의 강익중, 3회 광주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인 바이런 김 등과 함께 뉴욕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한국 작가로 꼽힌다. 그의 회화는 우아한 수학적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그는 한국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재치있게 미국 모더니즘의 본질에 접근한 작가다.
78년 동아미술대전에서 수상, 주목받았으나 사회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정보기관의 간섭에 시달리다 도미한 변종곤씨도 현재 뉴욕에서 자주 전시를 여는 중견 한국인 작가. “쓰던 물감 하나 들고” 뉴욕으로 온 그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길거리에서 주운 폐품 등을 이용하는 오브제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칼날 같은 시선으로 미국에 비판적인 주제를 담아 현지에서도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역시 뉴욕이 주는 긴장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 가면 동료작가 중 이미 정상에 왔다는 자만심에 배가 나와 있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뉴욕에 있으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죠.”
이러한 압박감을 남성들보다 훨씬 더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는 한국인 여성 작가들을 소호에서 만난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조숙진과 박유아씨.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몇 차례 전시를 가졌지만 서울보다는 뉴욕에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임을 그들의 작업실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동네 철거현장에서 나온 조악한 나무판 등을 직접 끌어다 스펙터클한 조형물로 엮는 조숙진씨나 종이공장에서 펄프를 퍼다 크레인에 매달려 작품을 만드는 박유아씨의 힘은 바로 뉴욕의 ‘기’와 맞서면서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편 뉴욕 독립영화계에 진출하는 한국 영화인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젊은 한국 영화감독들이 독립영화인들의 꿈으로 불리는 선댄스영화제에 잇따라 초대받는 등 성과도 뚜렷해졌다.
미라 소르비노, 김혜수 등이 함께 출연한 영화 ‘투 타이어드 투 다이’의 진원석, 98년 ‘미스 월요일’로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벤슨 리, 2000년 선댄스영화제 진출로 화제가 된 ‘동화’의 교포감독 이지호 등이 그들이다. 대개 교포 1.5세 혹은 2세인 이들의 작업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무게 중심이 놓인다.
“영화를 하게 된 것도 근본적으로는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는 점 때문일 겁니다. 뭔가 표현하려는 욕구가 영화를 만들게 했으니까요.”(벤슨 리)
벤슨 리의 첫 번째 영화 ‘미스 월요일’은 거식증을 통해 성공의 이면을 그린 영화. 한국말은 서투르지만 백제, 화랑제도 등 한국 감독들 사이에선 ‘인기 없는’ 소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그는 다음 작품으로 교포들의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소울 서칭’을 제작할 계획이다.
지난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김대실감독은 유학 1세대로 미국에서 학자의 길을 걷다 뒤늦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했다. 뉴욕 예술위원회 미디어 프로그램 디렉터로 백남준을 후원하기도 했던 김감독은 “사회적 약자에게 목소리를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 ‘침묵의 소리’는 한국인 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동명의 책으로도 출판됐다. 또한 그가 연출한 영화 5편 중 4편은 공영방송 PBS 전파를 탔다.
“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편이었고 미국 남자와 결혼해 살지만 한국인도 서양인도 아닙니다. 한국에 뭔가 빚진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영화를 만듭니다.”
뉴욕에서 만난 한국인 작가들은 뛰어난 성과를 거두면 거둘수록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던 장벽을 만나게 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뉴욕에 남아 있는 것은 무모할 정도로 실험적이고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이 숨쉴 수 있는 제도와 공간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관(MOMA)이나 링컨센터는 독립영화에 상영의 기회를 제공해 명성을 얻고 있으며 소호의 ‘안젤리카’처럼 비상업적인 영화를 상영하는 복합상영관도 있다. 또한 한국의 상업화랑과는 달리 “뉴욕의 상업화랑이야말로 가장 첨단의 양상이 드러나는 곳”(이상남)이기도 하다.
그러나 뉴욕에서 성공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새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주는 곳이다. 대신 새롭지 않고, 그래서 팔리지 않으면 예외없이 사라진다. 소호의 대표적 전시공간 중 하나였던 소호 구겐하임 1층을 최근 패션숍인 프라다가 차지한 사실이 작가들에겐 하나의 경고성 에피소드로 회자되고 있다.
프랫 인스티튜트를 나와 뉴욕에서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딘 정신영씨는 “새로운 것을 너무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함정도 많다. 계속 긴장하지 않으면 자신은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뉴욕의 장점은 현대의 예술가에게 마케팅을 가르치고 그 기회를 비교적 공평하게 제공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호와 첼시에만 비영리로 운영되는 전시공간이 20개 이상 된다. “크고 작은 영화사들이 매일 문을 닫고 열며”(벤슨 리) IFFM처럼 유명한 독립영화 시장이 열려 저예산 감독들이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다. ‘블레어 윗치’같은 단순한 아이디어를 전세계적 영화마케팅으로 이어주는 곳도 뉴욕의 독립영화계다.
그러므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세계 시장의 마케팅에서 승부를 내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게 작가들의 말이기도 하다.
소호에서 한국 작가를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 사이에 집단적-개인적 교류는 거의 없다고 한다. 한 작가는 “뉴욕에선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고도 했다.
“한국인이라고 작가들이나 감독들을 따로 만나진 않아요. 그러나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겠다는 정신을 가진 후배들이 있다는 느낌, 그들과 어두운 골목을 같이 헤매며 싸우고 있다는 사실로 뿌듯한 곳이 뉴욕입니다.”(김대실감독)